1904년 부산 동래, 전란 속에서 시작된 특별한 여정
가을마다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하는 노벨 과학상 명단은 전 세계 지식인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과학 분야 수상자 배출을 염원해 온 만큼 관련 소식에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노벨위원회의 공식 인명록을 꼼꼼히 살피다 보면 많은 이들이 잘 모르는 뜻밖의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198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 명단에 출생지가 '대한민국 부산(Busan, Korea)'으로 공인된 인물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거대 고리형 화합물인 '크라운 에테르'를 처음 합성해 현대 화학의 판도를 바꾼 찰스 존 피더슨이다.
피더슨이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인 부산에서 태어난 배경에는 20세기 초 한반도를 덮친 러일전쟁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당시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는 노르웨이 출신의 유능한 해양 기술자였던 브레데 피더슨이 채굴 기계를 관리하는 주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는데, 대한제국이 미국 기업에 채굴권을 넘겼던 운산 금광은 당시 전 세계 광산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모여든 거대한 다국적 광산촌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가족과 함께 건너온 일본인 여성 야스이 타키노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1904년 초 러일전쟁이 터지자, 북방 국경 지대인 평안도 일대는 삽시간에 전쟁의 화염에 휩싸였다. 임신 만삭이었던 아내의 안전을 염려한 아버지는 포화가 미치지 않는 남쪽 항구 도시 부산으로 가족을 피신시켰다. 피란 생활이 이어지던 그해 10월 3일 부산 동래군에서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찰스 존 피더슨이었다. 전황이 진정되자 가족은 피더슨이 네 살 되던 해 다시 운산으로 돌아갔다. 서구식 기술자 거주 구역에서 자라며 자연스레 영어를 모국어로 익힌 어린 피더슨은 쿵쾅거리는 거대한 분쇄기와 증기기관, 그리고 암석에서 순수한 금을 분리해 내는 시안화물 용액의 변화를 매일 지켜보았다. 훗날 그는 광산 특유의 화학 약품 냄새와 기계 장치 속에서 보낸 이 시기가 물질의 변화에 호기심을 품게 된 최초의 계기였다고 돌아보았다.
박사 학위 대신 산업 현장을 택한 실천적 화학자
피더슨이 여덟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고자 일본으로 보냈다. 그는 나가사키의 가톨릭 수녀원 학교를 거쳐 요코하마에 있던 국제 미션스쿨 세인트 조셉 칼리지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학교 실험실에서 정규 화학 수업을 접하며 원소들이 결합하고 쪼개지며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로 거듭나는 조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1922년, 열여덟의 피더슨은 더 큰 배움을 얻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 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뛰어난 실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졸업 후 당대 유기화학의 산실이었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대학원에 진학해 유기화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뛰어난 관찰력과 정밀한 손끝 감각을 눈여겨본 지도교수는 그에게 대학원에 남아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강단에 설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그러나 청년 피더슨의 생각은 달랐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오랜 세월 자신을 뒷바라지하며 헌신한 아버지의 경제적 부담을 하루라도 빨리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는 1927년, 학계에 남는 길 대신 세계적인 화학 기업 듀폰의 잭슨 연구소에 평연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미국 학계와 대기업 연구소는 박사 학위 중심의 위계가 견고했기에, 석사 출신 연구원이 독자적인 연구를 이끌기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했다. 그러나 피더슨은 학벌이나 직함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듀폰에서 꼬박 42년 동안 현장을 지키며 합성고무 제조 공정을 개선하고, 휘발유 첨가제와 고분자 산화방지제를 개발하는 등 산업계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실용적인 화학 연구를 묵묵히 완수했다.
실패한 실험관 바닥에서 발견한 '분자의 왕관'
피더슨의 인생을 뒤흔든 결정적인 순간은 환갑을 앞둔 쉰여덟 살이던 1962년에 찾아왔다. 당시 그는 바나듐이나 철 같은 전이 금속이 고무나 중합체의 산화를 부추기는 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금속 이온을 단단히 붙잡아 화학적 활성을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킬레이트 화합물을 합성하고 있었다. 그는 카테콜 유도체와 클로로에틸 에테르 화합물을 반응시켜 양 끝에 페닐기가 달린 기다란 선형 분자를 얻고자 했다.
합성 반응을 끝낸 플라스크를 확인했을 때, 목표했던 화합물 외에 바닥에 극히 소량의 하얀 결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수득률이 0.4퍼센트에 불과한 아주 미미한 침전물이었다. 대다수 합성 화학자라면 부반응으로 생겨난 불순물 찌꺼기로 여겨 씻어 버렸을 법한 물질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현장에서 직관을 갈고닦은 피더슨은 이 기이한 침전물을 예사롭게 넘기지 않았다.
그는 이 결정을 긁어모아 용해도를 시험했다. 결정은 순수한 메탄올에 전혀 녹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수산화나트륨(NaOH) 수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리자, 녹지 않고 겉돌던 하얀 결정이 순식간에 투명하게 용해되었다. 기름과 친한 성질의 유기화합물이 특정 무기염 양이온을 만났을 때만 마법처럼 녹아드는 현상은 기존 화학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피더슨은 구조 분석을 거듭한 끝에, 원료 속에 섞여 있던 소량의 불순물이 두 개의 에테르 사슬과 반응하며 고리 모양으로 닫히면서 새로운 화합물이 생성되었음을 밝혀냈다. 탄소 열두 개와 산소 여섯 개가 번갈아 엮인 거대한 고리형 화합물, 바로 '디벤조-18-크라운-6'였다. 분자 모형을 조립해 본 피더슨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면 고리 안쪽으로 산소 원자들의 비공유 전자쌍이 일제히 모여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중세 군주들이 머리에 쓰던 왕관(Crown)을 빼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왕관의 빈 구멍 속으로 나트륨 양이온이 정확한 크기로 쏙 들어가 안정하게 둥지를 틀면서, 유기용매 속에서도 염이 완벽하게 녹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열쇠와 자물쇠처럼, 분자 인식과 초분자 화학의 태동
피더슨의 이 우연하고도 집요한 발견은 고전 화학의 기본 패러다임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이전까지의 화학이 원자와 원자가 전자를 강하게 공유하며 이어지는 공유 결합에 집중했다면, 크라운 에테르는 분자의 입체적 크기와 정전기적 끌림만으로 특정 물질만을 족집게처럼 골라잡는 '분자 인식(Molecular Recognition)'의 세계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 왕관 모양 분자들은 고리의 크기에 따라 손님을 대단히 까다롭게 가려 받았다. 고리 구멍의 직경이 작은 12-크라운-4는 크기가 작은 리튬 이온을 선택적으로 품었고, 15-크라운-5는 나트륨 이온을 선호했다. 피더슨이 처음 합성한 18-크라운-6는 칼륨 이온과 완벽한 자물쇠-열쇠 짝을 이루며 결합했다.
이 발견은 생명과학의 오랜 미스터리를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었다. 생물체의 세포막은 어떻게 무수한 전해질 속에서 칼륨과 나트륨을 정확하게 구별해 세포 안팎으로 드나들게 하는가? 피더슨의 크라운 에테르는 세포막 단백질의 이온 통로가 수행하는 고도의 생체 분자 선택성을 시험관 안에서 인공적으로 재현해 낸 최초의 분자 모델이었다.
1967년 피더슨이 미국 화학회지에 논문을 발표하자 화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미국의 도널드 크램과 프랑스의 장마리 렌은 피더슨의 고리 분자를 삼차원 입체 공간으로 확장하여 크립탠드와 스페랜드 같은 새로운 분자 감옥을 연이어 합성했다. 이는 분자와 분자가 서로를 알아보고 조립되는 '초분자 화학(Supramolecular Chemistry)'이라는 현대 화학의 거대한 신생 학문으로 만개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987년, 스웨덴 왕림과학원은 피더슨과 크램, 렌 세 사람에게 노벨 화학상을 수여했다. 듀폰에서 정년퇴직한 지 18년이 지나 여든셋의 노인이 된 피더슨은, 박사 학위 없이 기업 현장의 땀방울로 노벨상을 거머쥔 드문 인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국경과 학벌을 넘어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분자 기술
피더슨이 실험실에서 건져 올린 분자의 왕관은 오늘날 21세기 첨단 과학 곳곳에서 핵심 기틀로 쓰이고 있다. 정상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표적 암세포에만 결합해 치료제를 방출하는 스마트 약물 전달 시스템(DDS)은 분자 인식의 원리를 정밀하게 응용한 결과이다. 원자력 발전소의 사용후핵연료에서 세슘이나 스트론튬 같은 치명적인 방사성 동위원소만 선택적으로 걸러내는 고도 정화 기술, 그리고 전기차 배터리의 전해액 안에서 리튬 이온의 이동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차세대 이차전지 기술 역시 크라운 에테르의 후예들이다.
노벨위원회는 수상자의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인류 문명에 기여한 개인의 업적을 기린다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출생지를 공식 기록으로 남긴다. 피더슨은 평생 미국 국적으로 살았고, 전혀 한국 혈통도 아니었지만, 노벨위원회의 공식 문서에는 대한민국 부산이 그의 영원한 출발점으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피더슨의 삶이 바로 과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묵직하게 말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위대한 발견은 화려한 학벌이나 안락한 책상머리에서 저절로 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말이다. 실패한 실험 플라스크 바닥의 메마른 침전물 한 방울도 허투루 버리지 않았던 성실한 관찰력, 자연이 보내오는 사소한 신호에 귀 기울였던 한 현장 연구원의 집념이 인류의 화학 지평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 김민재 리포터
- minjae.gaspar.kim@gmail.com
- 저작권자 2026-10-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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