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된장, 간장은 한국인의 밥상에 빠지지 않는 양념이다. 요즘은 K-푸드의 맛을 내는 원재료로 해외에서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일상의 밥상에서 세계의 식탁으로 이어지는 장의 가치는 2024년 12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 목록에 오른 것이다. 등재 대상은 콩을 삶아 메주를 띄우고, 장을 담가 오랜 시간 돌보는 과정에 쌓인 지식과 신념, 관습 전반이다.
장의 맛과 향은 메주와 장독 속에서 콩을 발효시키는 미생물에서 나온다. 선조들은 메주를 띄우고 장을 묵히는 방법을 대대로 다듬으며, 미생물이 잘 자라는 환경을 경험으로 만들어 왔다. 실제로 전통 방식으로 담근 장에는 공장에서 만든 장보다 다양한 미생물이 산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시험연구소 연구팀은 전통 된장·청국장과 시판 제품을 비교·분석한 이 결과를 영국 응용미생물학회 학술지 ‘Letters in Applied Microbiology’에 발표했다.
장 속 세균을 종 단위로 구분하다
전통 장과 공장에서 만든 장은 발효 방식이 다르다. 전통 장은 따로 종균을 넣지 않고 원료와 주변 환경에서 들어온 미생물로 발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공장식 장은 맛과 안전성을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선별한 종균을 넣고 표준화된 조건에서 발효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렇게 통제된 발효가 장 속 미생물의 다양성을 줄일 수 있다는 지적은 이전 연구에서도 나왔다.
이를 정밀하게 확인하려면 장 발효의 핵심 세균인 바실러스(Bacillus)를 종 단위까지 구분해야 한다. 바실러스는 흙과 볏짚 등 자연 곳곳에 사는 막대 모양의 세균으로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를 많이 만들어 메주와 청국장을 발효시킨다. 청국장을 숟가락으로 뜨면 길게 늘어나는 끈적한 실도 바실러스가 만든다. 그러나 바실러스에는 서로 닮은 종이 많다. 유전자를 짧게 잘라 읽는 기존 분석 방식으로는 대개 '속(屬)' 수준까지만 가려낼 수 있어 장 속에 어떤 바실러스가 사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연구팀은 유전자를 길게 읽는 3세대 분석 기술을 썼다. 약 4,200개 염기에 이르는 유전자 구간(16S-23S rRNA 오페론)을 휴대용 나노포어 시퀀서로 한 번에 읽으면, 닮은 세균끼리도 종 단위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분석 대상은 국내 전통 생산자가 만든 된장 17종과 청국장 8종, 시판 공장식 된장과 청국장 각 2종 등 모두 29개 제품이다.
전통 방식이 지켜 온 미생물의 다양성
분석 결과 전통 장과 시판 장 모두에서 가장 많이 검출된 세균은 바실러스였다. 특히 바실러스 가운데 고초균과 그와 가까운 종인 바실러스 벨레젠시스, 두 종이 대부분의 제품에서 전체 세균의 절반 넘게 차지했다. 담그는 방식이 달라도 콩 단백질을 분해해 장 발효의 바탕을 만드는 역할은 바실러스가 공통으로 맡고 있었다.
다만 바실러스의 비중은 제조 방식에 따라 달랐다. 시판 된장에서 바실러스는 전체 세균의 92.5%를 차지했지만, 전통 된장에서는 64.9%였다. 시판 된장에 비해 전통 된장에는 다른 세균들이 더 포함돼 있다는 의미다.
전통 된장에서 상대적으로 많이 나온 세균은 크게 세 부류다. 종균으로 넣지 않았는데도 발효 과정에서 자란 유산균, 높은 온도에서 잘 자라는 고온성 세균, 소금 농도가 높은 환경을 견디는 내염성 유산균이다. 특히 내염성 유산균은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숙성하는 된장의 짠 환경에서도 살아남는다. 연구팀에 따르면 이 세균들은 콩 단백질을 아미노산으로 분해하고, 그 아미노산을 다시 대사해 장 특유의 맛과 향을 내는 성분을 만드는 데 관여한다.
세균이 다양해지면서 장맛의 개성도 뚜렷해졌다. 전통 된장 한 제품에서는 최대 44개 무리의 세균이 확인됐고, 세균 군집의 풍부함과 고른 정도를 함께 보여주는 섀넌 지수도 전통 된장이 평균 2.1로 시판 된장(1.4)보다 높았다. 또 전통 된장은 생산자마다 세균 구성이 제각각이었지만, 시판 제품끼리는 서로 비슷했다. 연구팀은 이런 세균 구성의 차이가 전통 된장마다 다른 맛과 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해석했다.
장 담그기의 지식이 지켜 온 미생물 생태계
세균의 다양성을 기른 또 하나의 요인은 발효 기간이었다. 몇 달에서 몇 년씩 묵히는 된장과 달리 청국장은 40~50도에서 하루이틀 만에 발효를 마친다. 그 결과 전통 청국장은 바실러스 비중이 90.3%에 달해 시판 제품과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연구팀은 발효 시간이 짧아 다른 세균이 다양해질 여유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 담그기의 지식과 관습은 이처럼 장 속 미생물의 다양성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종균 없이 메주를 띄우고, 열린 장독에서 오랜 시간 장을 묵히는 전통 방식이 다양한 세균이 함께 자라는 조건이 됐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전통 방식의 자연 발효는 더 복잡한 미생물 생태계를 지탱하는 반면, 통제된 산업 공정은 군집의 안정성과 재현성을 우선한다"고 밝혔다. 공장식 생산이 품질을 일정하게 지키는 대신 미생물의 다양성을 내준다면, 장 담그기 문화를 보전하는 일은 장독 속 미생물 생태계를 보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연구팀은 시판 제품 시료가 4종에 불과해 전통 장과 공장식 장의 차이를 예비적 결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분석은 세균만 대상으로 해 메주 발효에 중요한 곰팡이와 효모는 다루지 않았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은 이번 결과를 전통 식품 품질인증 제품의 관리에 활용할 계획이다. 최수아 시험연구소장은 "철저한 과학적 품질관리와 모니터링을 통해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순창에서 세계로 이어지는 장 담그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오른 장 담그기 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축제도 열렸다. 전북 순창군은 15일부터 18일까지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과 순창발효테마파크 일원에서 제21회 순창장류축제를 열었다. 올해 주제 '세계인의 입맛, 순창에 담다'에 맞춰, 내외국인이 함께 고추장을 담그는 '글로벌 고추장 만들기'와 순창의 장류 문화를 배우는 '글로벌 장문화학교'가 운영됐다. 조선시대 순창고추장을 임금에게 진상하던 모습을 재현한 '임금님 진상행렬'도 축제의 볼거리였다.
순창장류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의 2026년 예비 글로벌 축제로 선정되면서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과 다국어 안내를 확대했다. 외국인 방문객이 직접 메주를 만지고 장을 담가 보는 체험은 유네스코가 등재한 장 담그기의 지식과 관습을 해외에 알리는 기회다.
다만 장이 세계 시장으로 나아갈수록 대량생산에 따른 고민도 깊어진다. 대량생산은 장맛을 일정하게 맞추는 데 유리하지만, 연구팀은 논문에서 그 과정에서 미생물의 다양성이 줄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한결같은 장맛을 지키면서도 집집마다 고유한 장맛을 만드는 미생물의 다양성을 잃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그 다양성은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는 문화가 이어질 때 지켜진다. 그런 점에서 세계인이 전통 방식의 장 담그기를 직접 경험한 이번 순창장류축제는 장맛과 함께 그 맛을 만드는 방식의 가치를 알리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김현정 리포터
- vegastar0707@gmail.com
- 저작권자 2026-10-21 ⓒ ScienceTimes
관련기사

뉴스레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