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자나 경쟁자를 피해 더 좋은 환경으로 이동하는 동물과 달리, 식물은 평생 한 자리에 뿌리 내린 채 살아간다. 그렇다면 주변에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식물은 어떻게 대응할까?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식물은 향기를 이용해 주변 식물의 성장 속도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성장 전략을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 결과는 지난 5월 28일 국제학술지 ‘실험식물학저널(Journal of Experimental Botany)’에 게재됐다.
많은 메시지가 담긴 식물의 향기
식물은 초식동물, 꽃가루를 매개하는 곤충, 다른 식물과 소통하기 위해 휘발성 유기화합물(VOCs), 즉 향기를 활용한다. 지금까지 식물의 화학적 의사소통 연구는 주로 ‘위험 경보’에 초점을 맞춰 왔다. 가령, 애벌레가 잎을 갉아 먹으면 공격받은 식물이 VOCs를 방출하고, 주변 식물이 방어 체계를 활성화한다는 식이다.
식물의 향기가 일종의 화학적 경고 신호라면, 위험에 놓이지 않은 식물에서도 왜 향기가 날까. 벨레미르 닌코비치 스웨덴 농업과학대 교수팀은 건강한 식물이 방출하는 VOCs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성장 속도가 서로 다른 세 품종의 보리를 이용한 실험을 진행했다. 느리게 자라는 ‘페어리테일(Fairytale)’과 중간 속도의 ‘루카스(Luhkas)’, 빠르게 자라는 ‘살로메(Salome)’ 품종이다. 보리는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작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보리가 어떻게 주변 식물과 상호작용하며 성장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농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세 보리 품종은 서로 다른 VOC 조성을 갖고 있다. 연구진은 식물들이 서로 직접 경쟁하지 못한 상태로 25일 동안 보리를 성장시켰다. 뿌리가 맞닿지도 않고, 빛을 가리지도 않으며, 물과 영양분을 두고 경쟁하지도 않았다. 오직 공기 중 VOC만 전달되도록 설계했다. 이후, 연구진은 각 보리의 물리적 특성과 유전자 발현 변화를 분석해 성장 및 방어 전략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측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빠르게 자라는 ‘살로메’의 VOC를 맡은 식물은 성장 속도를 높였다. 잎과 줄기, 뿌리 전체에서 생체량(biomass)이 증가했고, 성장 관련 유전자들이 활성화됐다. 반면, 느리게 자라는 ‘페어리테일’의 VOC에 노출된 식물은 성장을 줄이고 방어 체계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했다. 성장 속도가 비슷한 식물들이 방출한 VOC는 성장 및 방어 전략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를 ‘성장-방어 균형(Growth-Defense Trade off)’이라 설명했다. 빠르게 자라는 식물의 향을 맡으면 경쟁자가 강하다고 판단, 성장에 대한 투자를 늘린다. 반대로 느리게 자라는 식물의 향을 맡으면 급하게 큰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성장을 억제하고 스트레스 대응과 초식동물 방어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닌코비치 교수는 “VOC 신호를 받은 식물들은 이웃 식물의 향기가 전달하는 경쟁 압력 수준에 맞춰 자신의 성장을 조절했다”며 “이러한 효과는 잎, 줄기, 뿌리 등 식물의 특정 부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식물 전체에서 일관되게 관찰됐다”고 말했다. 이어 “단순히 자원을 재배분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성장 규모 자체가 달라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전자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했다. 느리게 성장하는 식물의 VOC에 노출된 개체에서는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스트레스 반응 유전자들이 활성화됐으며, 세포 내 물질 수송과 DNA 복제에 관한 유전자들은 억제됐다. 빠르게 성장하는 식물의 VOC에 노출된 개체에서는 성장 관련 유전자들이 활성화되고, 방어 관련 유전자들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식물의 성장 속도 조절하는 ‘식물 페로몬’ 기술 개발 기대
식물은 환경 변화에 반응하는 수동적 생물로 여기기 쉽지만, 이번 연구는 향기를 이용해 주변 개체들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성장과 방어 사이의 균형을 조절하는 능동적인 전략가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농업 분야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크다. 특정 VOC 조합이 성장 촉진, 병해충 방어, 수량 증가를 유도한다면 향후 ‘식물용 페로몬’ 같은 방식으로 작물의 성장 전략을 조절하는 기술이 가능할 수 있다. 수확량을 높이고 싶을 때는 빠른 성장 신호 VOC를 활용하고, 병충해가 예상될 때는 방어 유도 VOC를 활용하는 식이다.
닌코비치 교수는 “식물은 생물학적 활동의 일부로서 풍부한 휘발성 화합물을 방출하는데, 수백만 년에 걸친 공존 과정에서 이웃 식물들이 서로의 화학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을 진화시킨 건 매우 타당해 보인다”며 “화합물의 종류의 반응의 강도는 종마다 다르겠지만, 이러한 유형의 상시적 VOC 상호작용이 식물계 전반에 널리 퍼져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 yskwon0417@gmail.com
- 저작권자 2026-06-25 ⓒ ScienceTimes
관련기사

뉴스레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