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연말이면 저명 국제학술지들은 한 해를 빛낸 인물과 사건을 선정해 발표한다.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는 지난 8일 한 해 동안 나타난 과학적 발견을 조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와 주요 변화를 이끈 인물 10인을 ‘Nature’s 10‘으로 선정해 발표했다. 올해의 인물에는 우주의 가장 먼 곳과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을 탐구한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태어난 지 17개월이 된 최연소 10대 인물이 선정되어 주목을 모았다.
과학의 원칙을 지키다 해임된 미국 최고 공중보건 책임자, 수잔 모나레즈
첫 번째 인물로는 수잔 모나레즈 전(前)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이 선정됐다. 미생물학과 면역학을 전공한 모나레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임한 인물 중 드물게 논란이 거의 없는 후보였다. 그러나, 국장직을 맡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의회 청문회에서 모나레즈는 ‘과학적 정직성을 지키려다 해고됐다’고 말했다. CDC의 핵심 과학자들을 해고하라는 지시와 과학적 검증을 마치지 않은 백신 권고안을 승인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결과라는 주장이었다. 로버트 주니어 케네디 미국 보건장관은 반(反) 백신 운동을 벌여온 인물로, CDC 인력의 약 4분의 1을 해고하려 시도했다. 또한, 백신 정책을 자문하는 위원회의 모든 위원을 교체했으며, 새로 임명된 위원들에게 공개적으로 백신을 비판해 온 인사들을 포함시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모나레즈의 해임 이후, CDC의 최고의료책임자를 포함한 고위 과학자 3명은 모나레즈의 해임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모나레즈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과학은 더 나아지기 위해 도전하는 것”이라며 “편의를 위해 도덕성이나 과학적 정직성을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논문 부정행위 경고한 과학 탐정, 아찰 아그라왈
인도 학계의 고질적 연구 윤리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데이터 과학자 아찰 아그라왈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아그라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당시, 학생들의 표절에 대한 인식이 저조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후 2022년 대학을 떠나 ‘인도 리서치 워치(IRW, India Research Watch)’를 설립해 인도 전반에 퍼진 연구 윤리 위반 문제를 알리는 데 전념해왔다. IRW는 연구자와 학생들이 표절을 포함한 각종 출판 윤리 위반 문제를 폭로하고 논의하는 공간이다. 지난해에는 국가별 논문 철회 현황을 시각화하여 공개하기도 했는데, 인도는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논문 철회가 많은 국가로 드러났다. 그 노력 덕분에 올해 8월 인도 정부는 대학 및 국가기관평가 체계에 소속 연구자들의 논문 중 상당수가 철회될 경우 해당 기관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과거에는 연구의 질과 무관하게 논문 수가 많을수록 유리하게 평가됐지만, 비윤리적 관행을 억제하는 목적에서 도입됐다. 네이처는 아그라왈과 동료들이 인도 고등교육기관 평가 방식에 중대한 정책 변화를 견인했다고 평가했다.
새롭게 우주를 보는 길을 연, 토니 타이슨
우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길을 연 토니 타이슨 미국 데이비스캘리포니아대(UC데이비스) 교수도 10대 인물로 선정됐다. 1996년 우주의 팽창 속도를 연구하던 타이슨 교수는 넓은 하늘을 관측할 망원경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렇게 2015년 베라루빈천문대의 건설 작업이 시작했고, 올해 첫 관측 이미지를 공개했다. 해발 2,647m 칠레 세로파촌산 정상에 자리한 베라루빈천문대는 역대 망원경 중 가장 큰 시야로 3일 밤마다 남반구에서 보이는 하늘 전체를 관측한다. 한 번에 관측하는 영역이 무려 보름달 크기의 45배다. 허블우주망원경이 보름달 크기의 1%, 제임스웹우주망원경이 보름달 크기의 75%를 관측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베라루빈천문대가 얼마나 큰 눈을 가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 베라루빈천문대는 말 그대로 밤하늘에 보이는 모든 것을 관측한다. 앞으로 10년 동안 우주의 ‘타임랩스’ 영상을 만든다는 것이 목표다. 이 과정에서 우주의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에 대한 단서를 찾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최초의 팬데믹 조약을 만든 프레셔스 마토스
올해 4월 16일 세계적 공중보건 협력의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세계보건기구(WHO) 회원인 약 190개국이 최초의 글로벌 팬데믹 조약(Pandemic Treaty) 초안에 합의한 것이다. 이 역사적 협상은 수년에 걸친 고강도 협상 끝에 이뤄졌다. 그 핵심에는 프레셔스 마토스 WHO 정부간 협상 기구 공동 의장이 있었다. 네이처는 팬데믹 조약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글로벌 건강 전략의 협력과 연대를 증진시킨 공로로 마토소 의장을 10대 인물로 선정했다. 조약 초안은 WHO 총회에 제출되어, 더욱 광범위한 검토 빛 법적 채택 절차를 밟게 된다.
헌팅턴병 치료 기반 마련한 사라 타브리지
올해 영국에서는 치명적 유전성 뇌질환인 헌팅턴병에 걸린 환자를 대상으로 처음으로 유전자 치료에 성공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연구를 이끈 인물은 사라 타브리지 영국 런던대 헌팅턴센터장. 헌팅턴병은 뇌에 비정상 단백질이 축적되면서 심신이 망가지는 병으로, ‘무도병’으로도 불린다. 지금까지 이 병을 근본적으로 늦추거나 완치할 치료법은 없었다. 사라 타브리지 센터장 팀은 지난 9월 자체 개발한 AMT-130을 투여 받은 환자들이 36개월 동안 병의 진행 속도가 약 75% 느려졌다고 보고했다. 헌팅턴병의 진행 속도를 유의미하게 늦출 수 있다는 첫 증거가 확보된 것이다. AMT-130은 무해한 바이러스벡터를 이용해 유전물질을 환자의 뇌 특정 부위에 전달하는 식으로 작동한다. 전달된 유전물질은 돌연변이 헌팅턴 단백질의 생성량을 낮추는 기능을 한다. 현재는 네덜란드 바이오기업 ‘유니큐어’에서 임상 시험이 진행 중이다. 학계에서는 임상이 성공적으로 맞춘다면, 발병 원인이 유사한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도 같은 방식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장 깊은 동물 생태계를 발견한, 멍란 두
2024년 중국의 유인 잠수정 ‘펀도저(Fendouzhe)’에 탑승해 수심 9,000m가 넘는 태평양 북서부의 심해 해구로 내려간 멍란 두 중국과학원(CAS) 심해과학공정연구소 박사가 올해의 10대 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두 박사팀은 일본 동북쪽 쿠릴-캄차카 해구에서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생명체 군집을 발견했다. 연구진이 발견한 생태계는 전통적인 의미의 먹이사슬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에 사는 생물들은 햇빛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 해저 암석과 퇴적층 틈새에서 스며나오는 메탄과 황화수소 등 화학물질을 에너지원으로 살아가는 ‘화학합성 기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화학합성 생태계가 해저 열수구 주변에만 있다고 알려졌지만, 심해 해구 바닥에서도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네이처는 “깊은 곳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넘어, 생명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극한 환경에서도 다양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며 “두 박사팀의 연구는 생명의 한계와 그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한다”고 평가했다.
수십 억 마리의 모기를 기른 루시아노 모레이라
루시아노 모레이라 브라질 오스왈도 크루즈 재단 연구원은 브라질에서 질병 퇴치를 위해 수십억 마리의 모기를 사육 및 방출하는 혁신적 공중보건 프로그램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주목받았다. 브라질 남부 쿠리치바에는 이집트 숲모기를 대량으로 사육하기 위한 케이지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매주 8,000만 개 이상의 모기 알이 생산된다. 이곳에 사육되는 모기들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세균인 ‘울바치아’에 감염돼 있어 모기가 뎅기열, 지카, 치쿤구냐 같은 바이러스를 사람에게 전염시키는 능력을 크게 줄인다. 울바치아 감염 모기를 야생에 방사하면, 자연 개체군과 교배하면서 박테리아가 다음 세대로 전파되고, 그 결과 전염병의 확산이 억제된다.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
2025년 1월 중국의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는 ‘DeepSeek-R1’이라는 대형 언어 모델을 깜짝 공개했다. 그 중심에 선 딥시크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량원펑이 10대 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DeepSeek-R1은 매우 강력하면서도 저비용으로 개발된 모델로, 한 순간에 글로벌 AI 커뮤니티와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R1은 전통적인 대형 언어 모델과 비교했을 때, 뛰어난 추론 능력을 갖췄다. 네이처는 “R1 공개 이후 많은 전문가들이 생각한 것만큼 미국이 AI 분야에서 압도적으로 앞서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면역계의 새로운 메커니즘 밝혀낸 이파트 메르블
이파트 메르블 이스라엘 와이즈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인체 면역계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기능을 발견한 공로로 10대 인물로 선정됐다. 메르블 박사팀은 세포 내 단백질을 대부분 분해한다고 알려진 ‘프로테아좀’을 조사하던 중, 세포가 단백질을 쓰레기로 처리하는 과정 속에 숨겨진 면역 기능을 밝혀냈다. 프로테아좀이 단백질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짧은 펩타이드 조각이, 세균과 같은 병원체를 공격해서 죽이는 초기 방어선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메르블 박사의 연구는 면역학 분야에서 기존 놓치고 있었던 방어 전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박테리아 감염과 항생제 내성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 전략 개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맞춤형 크리스퍼 치료로 생명을 구한 아기, KJ 멀둔
생후 6개월에 맞춤형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치료를 받은 아기, KJ 멀둔도 10대 인물에 이름을 올렸다. 멀둔은 2024년 8월 미국에서 태어난 직후, 희귀 유전 질환인 CPS1 결핍증을 진단받았다. 이 질환은 간이 혈액 내 독성 암모니아를 제거하는 데 필수적인 효소를 만들지 못하게 해, 생후 몇 주 내에 뇌 손상 또는 사망을 초래한다. CPS1 결핍증 환아는 극도로 제한된 단백질 식이와 간 이식 외에는 치료법이 거의 없으며, 많은 경우 영아기에 사망한다. 필라델피아 어린이병원과 펜실베니아대 연구팀은 멀둔을 위한 맞춤형 유전자 편집 치료법을 개발했다. 크리스퍼 기술을 활용해 DNA 염기 하나를 정확하게 수정함으로써 변이된 CPS1 유전자를 바로잡았다. 3회에 걸친 치료 끝에 멀둔의 발단과 생존 상태는 뚜렷하게 개선됐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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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5-12-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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