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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김현정 리포터
2025-11-27

‘모든 길을 로마로 통한다’ 로마 제국의 도로망, 디지털 지도로 부활하다 2,000년 전 교통 인프라가 밝히는 고대 문명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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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 로마 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하나로 연결했던 도로망이 21세기 디지털 기술로 되살아났다. 

덴마크 오르후스대학교 역사·고전학과 연구소와 스페인 바로셀로나 자치대학교 고고학연구그룹, 그리스 과학연구센터 등 16개 기관이 참여한 국제 연구팀이 로마 제국 전역의 도로 299,171km를 디지털화한 'Itiner-e' 데이터셋을 공개했다. 

이는 기존 디지털 자료(디지털 로마·중세 문명 지도, DARMC)의 188,555km보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약 4,000,000㎢에 달하는 제국 전역을 포괄하는 14,769개의 도로 구간을 통해, 고대 로마의 도로망을 가장 상세하고 정확하게 재현해 낸 성과다. 이 연구 성과는 네이처 자매지인 'Scientific Data' 11월호에 발표됐다.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앞에 남아있는 고대 포장도로 큰 돌로 정교하게 포장된 로마 도로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 김현정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앞에 남아있는 고대 포장도로 큰 돌로 정교하게 포장된 로마 도로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 김현정 


4년간의 국제 협력, 2000년 전 도로를 되살리다

이번 연구는 2020년부터 2024년까지 4년간 진행된 대규모 국제 협력의 결과물이다. 덴마크 오르후스대학의 ‘MINERVA 프로젝트’가 북아프리카, 근동, 소아시아, 남동부 유럽의 도로망을 담당했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학의 ‘Viator-e 프로젝트’가 서부 로마 제국의 도로를 디지털화했다. 여기에 이집트 동부 사막을 담당한 프랑스 ‘ERC Desert Networks 프로젝트’를 비롯해 16개 기관의 전문가들이 각 지역의 도로 데이터를 제공했다.

연구팀이 활용한 자료는 다양했다.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확인된 도로 유적, 로마 시대 도로에 세워진 마일스톤 데이터, 고대 여행 안내서인 '안토니누스 여정기'와 '포이팅거 지도' 같은 역사적 문헌, 그리고 19~20세기 역사 지형도와 현대 위성 영상까지 총망라했다. 마일스톤은 로마인들이 주요 도로를 따라 일정 간격으로 세운 거리 표지로, 도로가 지나간 지점을 확인하는 핵심 단서가 됐다.

디지털화 작업은 3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에서는 문헌과 고고학 자료를 통해 도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2단계에서는 현대·역사 지형도와 위성 영상을 비교 분석해 정확한 위치를 추적했고, 3단계에서는 GIS(지리정보시스템)를 이용해 5~200m 해상도로 도로를 정밀하게 디지털화하여 각 구간마다 출처, 신뢰도, 경사도 등의 메타데이터를 추가했다.

연구진은 2단계 작업에서 많은 로마 도로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 도로 아래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지역에서는 로마 시대의 직교형 토지 분할 패턴이 현대의 도로와 농지 경계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로마가 계획적으로 설계한 도로망이 지역의 공간 구조를 근본적으로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또한, 이집트 동부 사막에서는 비아 하드리아나가 위성 영상에서 어두운 땅 위로 밝은 직선의 흔적으로 뚜렷하게 포착됐다. 그리스 아르고스와 만티네아 사이의 클리막스 고개에서는 산비탈을 가로지르는 급격한 지그재그 형태의 고대 도로가 부분적으로 현대 도로와 겹치면서도 여전히 식별 가능했다.

Itiner-e 도로망은 이베리아반도·에게해·이집트 등에서 DARMC보다 넓은 커버리지와 더 높은 공간 해상도를 제공하며, 일부 파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을 제외하고 제국 전역에서 세부 표현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Scientific Data
Itiner-e 도로망은 이베리아반도·에게해·이집트 등에서 DARMC보다 넓은 커버리지와 더 높은 공간 해상도를 제공하며, 일부 파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을 제외하고 제국 전역에서 세부 표현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 ⒸScientific Data


정밀도와 불확실성, 지역마다 큰 차이

이번 연구는 가장 포괄적인 데이터셋을 구축했음에도 로마 제국 도로 연구의 한계가 드러났다. 로마 도로의 존재는 확인됐지만 정확한 위치가 검증된 구간은 전체의 2.737%에 불과했다. 나머지 89.818%는 추정된 경로이고, 7.445%는 가설적 경로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가장 포괄적인 데이터셋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도로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확실하게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라며 "이는 우리가 로마 도로의 존재와 위치에 대한 지식 사이에 큰 불일치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모든 도로가 로마 시대에 사용됐다는 것은 알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대부분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체계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연구팀은 '신뢰도 지도(confidence map)'를 제작했다. 이 지도는 도로 밀도, 디지털화 정확도, 자료의 신뢰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각 지역의 데이터 품질을 한눈에 보여준다.

신뢰도 지도의 평가에 따르면 북아프리카, 근동, 소아시아, 그리스 일부 지역은 최근의 상세한 지역 연구 덕분에 높은 신뢰도를 보였다. 스페인 역시 이전 ‘Mercator-e 프로젝트’의 성과로 신뢰도가 높았다. 프랑스와 베네룩스 지역도 연구진의 집중적인 작업으로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했다.

반면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 동부 발칸 지역은 저해상도 자료에 의존해 중간 수준의 신뢰도를 나타냈다. 코르시카, 크레타, 서부 발칸, 상·중부 도나우 지역은 주로 배링턴 고대 세계 지도(Barrington Atlas)의 저해상도 지도만을 사용해 낮은 신뢰도를 보였다.

특히 사막 지역의 도로는 대부분 '가설적' 구간으로 분류됐다. 사막에서는 포장된 고정 도로가 아니라 여러 평행한 경로가 동시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집트 동부 사막의 경우, 18~19세기 낙타 대상의 여행 기록을 바탕으로 로마 시대와 유사한 환경 조건에서 낙타가 이동하는 방식을 고려한 최소비용경로(least-cost path) 모델을 적용해 로마 도로 정류장 간 가장 가능성 높은 경로를 재구성했다. 

여러 지역의 지형도와 위성·정사영상에서 고대 로마 도로의 흔적을 다양한 형태로 확인한 사례를 보여준다. ⒸScientific Data
여러 지역의 지형도와 위성·정사영상에서 고대 로마 도로의 흔적을 다양한 형태로 확인한 사례를 보여준다. ⒸScientific Data


고대 연결망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다

이번 데이터셋이 고대 이동성과 교역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기존 자료와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다. 기존 디지털 지도들은 도시와 도시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단순한 형태였다면, Itiner-e는 실제 지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경로를 정밀하게 재현했다. 산을 넘는 고갯길의 급격한 지그재그 구간, 강을 따라 우회하는 구간 등이 모두 5~200m 해상도로 표현됐다. 이는 고대인들의 실제 이동 경험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데이터는 도로의 위계를 반영해 주요 도로와 지방 도로로 구분됐다. 주요 도로로 분류되는 기준은 이정표가 세워져 있거나, 안토니누스 여정기나 포이팅거 지도 같은 고대 여정기에 기록된 도로, 또는 19~20세기 초 지도에서 주요 도로로 표시된 경우였다. 이렇게 분류된 주요 도로는 총 103,477.9km(34.58%)로, 문자 그대로 '모든 길을 로마로' 연결했던 제국의 핵심 인프라였다. 로마의 군단이 이동하고, 황제의 칙령이 전달되고, 제국의 행정이 작동하게 만든 도로들이다.

나머지 195,693.3km(65.42%)는 지방 도로다. 이들은 주요 도로만큼 문서화되지는 않았지만, 지역 간 이동성의 구조를 이해하는 열쇠다. 연구팀은 "주요 도로는 가장 많이 연구되고 문서화된 도로이기 때문에 더 이상 크게 증가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면 지방 도로는 미개척 지역에 대한 향후 데이터 수집을 통해 상당히 증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신뢰도 지도에서 낮은 등급을 받은 지역들을 중심으로 추가 조사가 이뤄진다면, 지방 도로 데이터는 크게 확장될 여지가 있다.

대표성 지도와 신뢰성 지도를 결합해 만든 신뢰도 지도 위에 로마 도로 데이터를 중첩한 모습. ⒸScientific Data
대표성 지도와 신뢰성 지도를 결합해 만든 신뢰도 지도 위에 로마 도로 데이터를 중첩한 모습. ⒸScientific Data

 

데이터 공개와 활용 전망

연구팀은 데이터를 Zenodo 저장소와 온라인 플랫폼(https://itiner-e.org)을 통해 공개하고, 학계의 지속적인 기여를 독려하고 있다. 플랫폼에서는 새로운 도로 데이터를 추가하거나 기존 데이터를 수정할 수 있으며, 각 도로 구간은 고유 URI(Uniform Resource Identifier)를 통해 인용 가능하다. 또한 고대 장소 목록인 Pleiades의 URI와 연결돼 있어 다른 디지털 고고학 자원과의 통합 연구도 용이하다.

다만 연구팀도 한계를 인정한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적 변화를 추적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도로 건설 시기나 폐기 시기에 대한 제국 전역의 비교 가능한 연대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데이터셋은 로마 제국이 최대 영토를 확보한 서기 150년경을 기준으로 하되, 로마 시대 동안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 모든 육상 경로를 포함하는 '정적 스냅샷' 형태다. 로마 도로망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려면 각 지역의 집중적인 연대 연구가 추가로 필요하다.

연구팀은 "이 데이터셋은 고대 이동성과 교역에 대한 공간적으로 명시적인 계산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라며 "로마 제국의 교통 인프라가 질병 전파, 경제 통합, 행정 효율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는 데 결정적 도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최근 연구들은 로마 도로가 경제 발전에 미친 장기적 영향을 분석하는 데 이 같은 정밀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유럽, 근동, 북아프리카 지역의 수천 년에 걸친 육상 이동성 발전사를 연구하는 데도 기준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출처: de Soto, P., Pažout, A., Brughmans, T. et al. Itiner-e: A high-resolution dataset of roads of the Roman Empire. Scientific Data 12, 1731 (2025).

김현정 리포터
vegastar0707@gmail.com
저작권자 2025-11-2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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