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이끌고 진료실에 들어갔지만 10분 남짓한 짧은 진료를 끝으로 서둘러 나오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환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상황을 자세하게 털어놓길 원해도, 바쁘게 돌아가는 진료 환경에서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일이 다반사다. 의사들도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싶지만 산더미 같은 업무 탓에 현실에서는 여유를 가지기 어렵다. 이렇게 의사는 바쁘고 환자는 답답한 상황이 반복되면, 의료 현장에 대한 불신도 깊어지게 된다.
한 마디 질문이 바꾼 환자의 하루
의료계 일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잘 듣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최근 메이요 클리닉 프로시딩스(Mayo Clinic Proceedings) 저널에 실린 한 논문은 진료 현장에서 듣는 행위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였다. 논문은 노르웨이의 한 요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에게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매일 간호사의 돌봄을 거부하며 골머리를 앓게 하는 한 환자에게, 간호사는 목욕 준비를 하며 다정하게 물어보았다. "오늘 어떻게 하면 기분 좋은 하루가 될가요?" 환자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곰곰히 생각한 끝에 대답하였다. "파란색 셔츠를 입고 싶어요." 목욕을 하며 이어진 대화 속에서, 파란색 셔츠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며, 파란색 셔츠를 입으며 환자는 아내와 다시 연결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목욕을 마칠 즈음, 환자는 환한 얼굴로 간호사에게 뜻밖의 부탁을 했다. “휠체어를 가져다 줄 수 있나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 아내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돌봄을 늘 거부하던 환자가 처음으로 스스로 휠체어를 타고 요양원 거실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연구진은 작은 질문 하나로 시작된 이 에피소드가 현실 속에서 경청의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설명한다. 겉보기엔 환자에게 이것저것 묻고 답하는 평범한 대화 같지만, 그 속에는 환자 개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필요를 중심에 둔 경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순히 증상만 묻는 것이 아니라 이 환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며 환자의 말을 끝까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이러한 경청 방식은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는 열쇠가 될 뿐 아니라, 동료 의료진 간이나 리더와 직원 사이의 관계까지 개선하는 힘이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는 일이 치료의 질을 높이고 조직 전체의 분위기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형식적인 대화보다 진짜 대화로 넘어가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환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청을 잘 할 수 있을까? 논문은 의료 현장에서 경청을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근접한 경청(Listening That is Proximate)',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가까이에서 이루어지는 경청이다. 환자든 동료든, 서로 곁에 있을 때 비로소 터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의사가 환자 곁에 의자를 끌어와 앉아 눈을 맞추면 환자는 의사가 더 오래, 더 진심으로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고 느껴 만족감이 크게 높아진다. 이 원칙은 환자 진료뿐 아니라 조직 운영과 동료 관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최고 경영자나 병원장이라면 병동 구석구석을 직접 찾아가 직원들과 대화하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동시에 동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두 번째로 강조되는 것은 '호기심 기반 경청(Listening That is Curious)'이다. 진정한 호기심을 갖고 질문하면 환자는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예를 들어, 진료 막바지에 “궁금한 것 있으세요?(Do you have any questions?)”라고 형식적으로 묻는 대신, “제가 드린 설명에 대해 어떤 걱정이나 궁금증이 드시나요?(What are your concerns about the plan of care we've discussed?)”처럼 열린 질문을 던지면 환자는 보다 솔직하게 속마음을 말하게 된다. 의사가 환자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고 눈을 보며 끝까지 듣는 것만으로도, 환자는 더 많은 정보를 털어놓지만 진료 시간이 과하게 늘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환자가 스스로 문제를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질문, 환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공간 설계와 제도로 만드는 경청 문화
경청은 물리적 공간의 영향도 받는다. 또 다른 경청 방법인 '공간 설계가 돕는 경청(Listening Aided by Design)'은 병원의 환경과 구조가 듣기를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많은 병원이 오래된 건물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환자와 프라이버시를 갖고 대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제약 속에서도 작은 변화로 경청을 도울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진료실에 커튼 대신 유리 칸막이를 두어 소리를 차단하거나 백색소음을 활용해 대화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위에서 언급했듯 의사가 환자 옆에 앉을 수 있는 자리 하나만 있어도 경청의 질은 많이 달라진다. 실제로 병동 침대 곁에 의사용 의자를 비치했더니 의사들이 자연스럽게 앉아 환자와 대화하는 빈도가 늘었고 환자 만족도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경청은 환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힘을 주는 경청(Listening That Empowers)'은 조직 구성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 이를 실제 변화로 연결하는 문화를 의미한다. 병원에서는 종종 새로운 지침이나 정책이 위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오지만, 현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의사, 간호사, 직원들이다. 이들의 경험과 어려움을 듣는 일은 환자와 직원 모두를 살리는 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한 의료 네트워크는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인 일을 제안해달라는 취지로 ‘쓸데없는 일 없애기(Getting Rid of Stupid Stuff)’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첫 해에만 약 200개의 제안이 올라왔고, 그중 하나였던 ‘간호사가 매 시간마다 환자 확인 내용을 모두 전산 기록해야 하는 규정’을 개선하자, 한 달에 약 1700시간의 간호 업무가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났다. 직원들은 자신의 의견이 실제 정책 변화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며 보람과 만족감이 높아졌고, 불필요한 절차가 줄면서 환자 서비스의 질도 함께 향상되었다.
경청은 친절이 아니라 치료의 시작
연구를 진행한 레너드 베리 박사는 환자와 의료진 모두의 가치를 지키면서도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이와 같은 듣기 방법들을 '가치 기반 경청(values-driven listening)'이라 명명하였다. 경청은 단순히 예의 바른 태도의 문제가 아닌, 치료의 출발점이자 의료 문화의 기반이다. 환자는 의사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는 순간, 비로소 의료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 이때 생기는 신뢰는 환자가 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와는 또 다른 차원의 것으로,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끼는 인간적인 신뢰이다. 의료진 입장에서도 환자의 말 속에는 진단과 치료의 실마리가 되는 중요한 단서들이 숨어있다. 결국 잘 듣는 것은 좋은 치료의 시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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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lue - and the Values - of Listening, Berry et al., 2025, Mayo Clin Proc
- 정회빈 리포터
- acochi@hanmail.net
- 저작권자 2025-11-1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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