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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3호를 무사히 귀환시킨 우주비행사, 달에 영원히 잠들다 달에 두 번이나 갔던 짐 러벨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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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3호를 무사히 귀환시킨 우주비행사, 97세로 별세

지난 2025년 8월 9일,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아폴로 13호 임무를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킨 우주비행사 짐 러벨(James Lovell)이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NASA는 "그는 잠재적 비극을 성공으로 바꾼 인물"이라고 추모했는데, 그는 실제로 1970년 수십만 마일 상공에서 발생한 우주선 폭발 사고에서 살아남았으며 이는 인류 우주 탐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생존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전 세계 수천만 명이 텔레비전으로 러벨과 두 명의 동료 우주비행사가 태평양에 착수하는 순간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러벨은 아폴로 8호 임무에도 참여했으며, 달에 두 번이나 방문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단 한 번도 달 표면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 NASA 대행 숀 더피는 이를 두고 러벨이 미국 우주 프로그램이 "역사적 길을 개척하는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NASA는 "그는 잠재적 비극을 성공으로 바꾼 인물"이라고 추모했다. © Getty Images
NASA는 "그는 잠재적 비극을 성공으로 바꾼 인물"이라고 추모했다. © Getty Images

러벨의 가족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그의 흔들리지 않는 낙관주의, 유머 감각, 그리고 우리 각자가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든 방식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전했다. 1995년 영화 '아폴로 13'에서 러벨을 연기한 톰 행크스는 인스타그램 성명에서 "감히 도전하고, 꿈꾸며, 우리 스스로는 가지 않을 곳으로 다른 이들을 이끄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추모하는데, 행크스는 러벨의 수많은 여행이 "부나 명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도전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것의 과정을 연료 삼기 때문"이었다고 전했다.

 

화약으로 만든 로켓과 우주비행사의 꿈 

어느 토요일, 16세 위스콘신의 한 소년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로 무거운 3피트 길이의 튜브를 끌고 간다. 그는 임시 로켓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설명하며 과학 선생님을 설득해 질산칼륨, 황, 목탄 같은 화약 재료를 손에 넣었으며, 보호를 위해 용접용 헬멧을 쓰고, 튜브에 화약을 채우고, 성냥을 켜고는 전력으로 도망치고 있다. 로켓은 80피트 상공으로 치솟았다가 폭발했는데, 만약 화학 물질의 배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소년은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짐 러벨에게 이것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로켓 과학자가 되려는 꿈을 이루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제임스 아서 러벨 주니어는 찰스 린드버그가 대서양을 횡단한 역사적 비행을 한 지 불과 1년 후인 1928년 3월 25일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두고 "소년들은 보통 공룡이나 비행기 둘 중 하나를 좋아하지만 나는 확실히 비행기 소년이었다"라고 회상한다. 그는 그의 나이 겨우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 블랜치는 온종일 일했지만, 식탁에 음식을 올리기도 버거울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다. 이런 그의 가족에게 대학은 경제적으로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해답은 미 해군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해군은 새로운 조종사를 키우길 원했으며 이에 러벨은 로켓을 만들 순 없었지만 적어도 비행은 할 수 있었다. 러벨은 군대의 도움으로 대학에 다니면서 전투기 조종사로 훈련받는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그리고 2년 후 그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선택이자 도박을 하는데, 그가 사랑하는 로켓과 함께 일하기를 바라며 체서피크 만의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로 적을 옮기게 된다. 그리고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행운의 결정이었다. 몇 달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의 이전 동료 견습 조종사들은 교육을 마치지도 못한 채 동아시아로 파견되었다.

러벨은 자신이 얼마나 로켓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주변에 알리기 시작했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그의 논문 주제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액체 연료 엔진이었으며, 졸업 후 그는 이 선구적인 새 기술을 업으로 삶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해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이에 러벨은 밤에 항공모함에서 밴시 제트기를 날리는 항공모함 그룹에 배치되었다. 물론 대담한 사람들만을 위한 스릴 넘치는 일이었지만, 러벨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그는 NASA '프로젝트 머큐리'에 지원했다. 이는 지구 궤도에 사람을 배치하려는 미국의 시도였는데, 짐 러벨은 선발 대상으로 고려된 110명의 테스트 조종사 중 한 명이었지만, 일시적인 간 질환이 그의 기회를 망쳐버렸다. 하지만 4년 후 그는 다시 시도했다. 1962년 6월 고된 의학 검사를 거친 후 NASA는 케네디 대통령의 달에 미국인의 발을 디디겠다는 약속을 이행할 사람들인 "뉴 나인"을 발표했는데, 이들은 역사상 가장 엘리트 비행사 그룹이었다. 닐 암스트롱, 존 영, 그리고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짐 러벨이 포함되었다.

 

아폴로 8호와 지구의 재발견

3년 후 러벨은 준비가 되었다. 우주로의 첫 여행은 2인승 제미니 7호를 타고 이루어졌는데, 러벨과 동료 우주비행사 프랭크 보먼은 스테이크와 달걀 아침 식사를 하고 지구를 떠났다. 그들의 임무는 사람이 우주에서 2주간 생존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달은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러벨의 다음 비행은 우주 신참 버즈 올드린과 함께 제미니 12호를 지휘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인류가 우주선 밖에서 무언가를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때 올드린은 어색하게 공허 속으로 기어 나가 5시간 동안 별을 촬영해 명성을 얻었다.

이제 대망의 달 차례였다. 아폴로 8호의 승무원은 지구 저궤도를 넘어 여행하고 다른 천체의 중력권에 진입하는 최초의 사람들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NASA의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러벨, 보먼 (Frank Borman), 앤더스 (William Anders)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을 시속 2만 5천 마일로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린 새턴 V 로켓은 거대했다. 그리고 이륙 68시간 후 그들은 마침내 해냈다. 엔진이 점화되고 아폴로 8호는 달 뒤로 조용히 미끄러졌으며, 지상 관제소로 가는 무선 신호가 약해지다가 끊어졌지만, 우주비행사들은 헤드셋에서 딱딱거리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매혹된 우주비행사들은 창문에 자신을 고정했다. 이들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 이웃의 뒷면을 본 최초의 인간들이었다. 그러고 나서 전진하는 지평선 너머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나타났다. 바로 "지구돋이(Earthrise)였다."

아폴로 8호의 승무원은 지구 저궤도를 넘어 여행하고 다른 천체의 중력권에 진입하는 최초의 사람들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NASA의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러벨, 보먼, 앤더스 등으로 구성되었다. © Getty Images
아폴로 8호의 승무원은 지구 저궤도를 넘어 여행하고 다른 천체의 중력권에 진입하는 최초의 사람들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NASA의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은 러벨, 보먼, 앤더스 등으로 구성되었다. © Getty Images

이때는 바야흐로 1968년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미국은 해외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국내에서는 시민들이 불안에 허덕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인류는 하나로 통합된 것처럼 보였다. 지구 인류는 함께 이들이 촬영하고 있는 우주의 황량함 속에서 빛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행성을 보고 있었으며 러벨은 지구 사람들에게 세계의 많은 위대한 종교의 기초인 창세기를 읽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경험으로 남았다. 그리고 우주선이 어둠에서 다시 나타났을 때 러벨이 먼저 좋은 소식을 알렸다. "알려드립니다. 여기에는 산타클로스가 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달에 발을 디디지도 않았다. 물론 그 영예는 케네디 대통령의 사후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뉴나인들은 달에 작은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를 통해서 인류는 거대한 도약을 할 수 있었다. 뉴 나인은 그들의 일을 해낸 것이다. 

 

"휴스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1970년 4월, 짐 러벨에게도 달에 착륙할 기회가 돌아왔다. 바로 잭 스위거트, 프레드 헤이스 등의 과학자들과 함께 아폴로 13호의 승무원이 된 것이다. 이들은 고도로 훈련받았고, 암스트롱과 올드린을 따라 달 표면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일이 심각하게 잘못됨을 깨달았다. 이들은 지구에서 20만 마일 상공에 있었고 목표에 접근하고 있었다. 필수 산소와 수소가 들어 있는 탱크가 필요했으며, 이에 스위거트가 스위치를 켰다. 이는 매우 일상적인 절차이지만 갑자기 사령선 오디세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소 압력이 떨어지고 전원이 꺼졌다.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스위거트가 말했다. 러벨은 충격을 받은 임무 관제소에 메시지를 반복해야 했다. "휴스턴,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Okay, Houston, we've had a problem here)."

1970년 4월, 짐 러벨에게도 달에 착륙할 기회가 돌아왔다. 바로 잭 스위거트, 프레드 헤이스 등의 과학자들과 함께 아폴로 13호의 승무원이 된 것이다. © Getty Images
1970년 4월, 짐 러벨에게도 달에 착륙할 기회가 돌아왔다. 바로 잭 스위거트, 프레드 헤이스 등의 과학자들과 함께 아폴로 13호의 승무원이 된 것이다. © Getty Images

아쉽게도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과소평가 중 하나로 기록된다. 승무원들은 큰 곤경에 처했으며 이어진 폭발이 우주선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이에 헤이스와 러벨은 달에 도착할 때까지 사용되지 않을 예정이었던 달 착륙선 아쿠아리우스를 부팅하기 위해 미친 듯이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는 열 차폐막이 없어서 지구 대기권에 재진입하는 데 사용될 수 없었지만 이를 통해서 생존을 건 싸움을 시작했다. 온 세상이 이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6분간의 고통스러운 침묵 후 잭 스위거트의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나왔다. 지상팀은 낙하산이 펼쳐지고 승무원이 안전하게 착수할 때까지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임무는 NASA의 가장 큰 실패로 기록된다.

 

겸손한 영웅의 마지막 모습

러벨의 삶은 실제로 20세기 중반 미국의 우주 개척 시대를 상징한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읜 소년이 자신의 열정과 끈기만으로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모험에 참여했다. 그는 폭발 직전의 로켓을 만들던 소년에서 인류를 달로 이끈 우주비행사가 되었다. 그 여정에서 그는 한 번도 달 표면을 밟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 누구보다 달과 더 깊은 관계를 맺었다. 아폴로 8호의 지구돋이 사진은 환경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인류가 공유하는 연약한 행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아폴로 13호의 극적인 귀환은 위기 상황에서 인간의 창의성, 침착함, 팀워크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러벨이 없었다면 이 두 가지 역사적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족이 그에 대해서 말했듯이, 러벨은 "흔들리지 않는 낙관주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우주선이 폭발하고 생존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순간에도, 그는 냉정함을 유지하고 해결책을 찾았다. 달 뒤편의 어둠 속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을 온 세계와 나누었다. 그는 단순히 우주를 여행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자신과 함께 데려갔다.

그의 가족에 따르면, 러벨은 "흔들리지 않는 낙관주의"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기억된다고 한다. © Getty Images
그의 가족에 따르면, 러벨은 "흔들리지 않는 낙관주의"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기억된다고 한다. © Getty Images

흥미롭게도 러벨은 1973년 해군에서 은퇴하고 베이-휴스턴 예인 회사에서 일하고 연설을 하며 전국 이글 스카우트 협회 회장으로 봉사하는 등 조용한 삶을 선택했다. 그의 책 "잃어버린 달: 아폴로 13호의 위험한 항해"는 1995년 톰 행크스가 짐 러벨로 출연한 유명한 영화가 되었는데, 영화를 위해 감독은 그에게 '제독' 복장을 하라고 요청한 바 있다. 이는 바다에서 구조된 승무원과 악수하는 카메오 장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달에 두 번 갔고, 지구돋이를 목격했으며, 우주에서 추운 죽음을 가까스로 피했던 짐 러벨은 그의 과거를 허위로 꾸밀 이유가 없다고 설명하며 자신은 대령으로 은퇴했으니, 대령으로 남아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리고 이 일화는 짐 러벨의 인격을 완벽하게 보여준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우주 임무를 이끌었고, 인류가 우주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 중 하나를 목격했으며, 불가능에 가까운 생존을 이뤄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명예와 직함보다는 실제로 이룬 것과 경험한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97년의 생애 동안 짐 러벨은 달에 두 번 갔지만 결코 착륙하지 못한 유일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산은 발자국보다 훨씬 크다. 그는 우리에게 인류가 하나라는 것을, 우리의 작은 행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었다. 창문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온 세상이 그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본 그 순간, 짐 러벨은 우리 모두가 같은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이다. 

김민재 리포터
minjae.gaspar.kim@gmail.com
저작권자 2025-10-1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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