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AI 세계 3대 강국'을 목표로 100조원 규모의 소버린AI 투자에 나선 가운데, 이러한 대규모 정책의 구체적 방향성을 두고 학계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새롭게 출범시킨 '소버린AI포럼'은 AI 기술주권 확립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 학계와 정책당국 간 소통 창구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8월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이 포럼에서는 경제적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술 현실론과 시민 권리를 강조하는 사회 가치론이 만나며, AI 기술 자립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특히 8월 5일과 11일에 열린 포럼은 각각 사회구조적 관점과 기술산업적 관점에서 소버린AI의 의미와 추진 방향이 심층 논의되었다.

인권과 디지털 민주주의 관점의 구조적 접근
8월 5일 열린 포럼에서 김현준 서울과학기술대 연구교수는 "인권, 데이터주권, 디지털민주주의: 한국 소버린 AI과제와 방향"을 주제로 소버린AI를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조명했다. 기술철학과 과학기술학을 전공한 김 교수는 AI를 현대판 '빅사이언스'로 규정하며 맨해튼 프로젝트와의 구조적 유사성을 분석했다.
"국가 중심의 총력적 자원 투입, 기술·과학·행정·자본의 통합, 기술 결정론적 신화의 강화라는 빅사이언스의 특성이 AI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며 "이 과정에서 군산학 복합체가 형성되고 권력 엘리트가 재생산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러한 구조가 소버린AI 담론에서 시민 권리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그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소버린AI 담론에서 시민 권리를 언급하는 비율은 33% 정도에 그치며, 정부와 공공기관의 언급률은 4.4%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 사례로 NVIDIA의 젠슨 황이 제시한 '소버린AI' 개념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각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자극해 GPU의 희소성을 극대화하는 영리한 마케팅 전략"이라며 "국가 간 경쟁을 부추겨 상품 가치를 유지하는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김 교수는 닉 다이어-위드포드(Nick Dyer-Witheford)의 '사이버네틱 순환 복합체(Cybernetic Circulation Complex, CCC)' 개념을 인용하여 AI가 글로벌 자본 순환을 가속화하는 메커니즘임을 설명했다. "AI가 자본 축적의 순환 속도를 무제한으로 높여 플랫폼 자본주의를 한 단계 진화시킨다"며 "추적 및 예측 알고리즘, 물류 자동화, 금융 자동화 등을 통해 인간보다 빠른 속도로 자본을 순환시킨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김 교수는 대안을 제시했다. "기업 주권, 국가 주권과 함께 시민 주권이 균형을 이뤄야 진정한 기술 주권을 확립할 수 있다"며 '감속 장치' 도입을 제안했다. "자본과 기술의 가속에 맞서 인간의 사유 속도에 기계를 맞추는 신체 정렬, 속도 정렬을 통해 충분한 검토와 사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견국 간 연대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빅테크 기업과 강대국 중심의 패권 구조에 대응하려면 중견국들 간의 연대와 다자간 협력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며 구체적으로 ▲시민 연대체와 국제 AI 규제 기관 구축 ▲영역별 차등적 AI 윤리/규제 정책 수립 ▲디지털 소외 계층의 참여 보장 ▲디지털/데이터 커먼즈 기반 정책 수립을 제시했다.
경제적 실익 중심의 기술자립론
8월 11일 열린 포럼에서 강승식 국민대 인공지능학부 교수는 "생성형AI의 기술과 성능이슈, 그리고 오픈소스"를 주제로 소버린AI 필요성을 산업적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AI 기술의 산업화 핵심을 '비용절감과 생산성 향상'으로 규정하며, 투입 대비 산출의 경제적 논리를 강조했다.
강 교수는 소프트웨어를 필수형(운영체제, 데이터베이스), 인건비 절감형(챗봇), 엔터테인먼트형(게임, 영화)으로 분류하며, 현재 생성형 AI가 주로 인건비 절감 영역에서 가치를 창출한다고 분석했다. "콜센터 직원 100명을 30명으로 줄일 수 있다면 70명분 인건비 절감 효과의 30-50%를 소프트웨어 업체에 지불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아래한글과 MS워드, 큐브리드와 오라클 등의 사례를 들어 기술 종속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글로벌 제품 대비 성능이 95% 수준이어도 자체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며 "전 세계 1억 명이 ChatGPT에 월 10달러씩 지불하면 월 10억 달러가 해외로 유출된다"고 외화 유출 문제와 연결지어 구체적 수치로 제시했다.
기술 개발 방향으로는 AGI(일반인공지능)보다는 '믹스트 오브 엑스퍼츠(MoE)' 방식을 제안했다. 법률, 의학, 컴퓨터과학 등 도메인별 전문가 모델을 만들어 통합하면 GPU 사용량을 대폭 줄이면서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트 AI로의 기술 전환을 분석하며, WindSurf와 Moonshot AI가 3년 만에 수조 원 기업가치를 달성한 사례를 통해 에이전트 AI 영역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한편, 강 교수는 한국 AI 연구환경의 구조적 문제도 지적했다. 트랜스포머, 인코더, 디코더 같은 핵심 기술의 소스코드를 깊이 이해하고 수정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한데 SCI 논문 중심의 평가 시스템이 실제 핵심 기술 개발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힌튼 교수나 오픈AI 창업자들은 실용적 목적으로 연구하다가 좋은 논문이 나온 것"이라며 "우리는 정반대로 논문부터 정해놓고 연구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100조 원 투자 계획에 대해서도 인풋 대비 아웃풋이 기대만큼 나올지 의문이라며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균형점 모색을 위한 지속적 논의가 필요
두 차례 포럼을 통해 소버린AI 구축을 위한 다층적 접근 방안이 구체화되었다. 김현준 교수는 시민 주권과 디지털 민주주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AI 거버넌스 체계 구축 방안을 제시했고, 강승식 교수는 경제적 실익과 기술 경쟁력 확보를 통한 현실적 구현 전략을 논의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AI사회연구소 한도현 소장은 "두 차례 포럼을 통해 소버린AI에 대한 다각적 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사회구조적 관점과 기술산업적 관점이 상호 보완하여 우리나라만의 균형 잡힌 AI 정책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부는 올해 말까지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5개 업체를 최종 선정할 예정이다. 100조 원 규모의 민관 합동 투자와 함께 추진되는 소버린AI 정책이 김 교수가 강조한 시민 참여와 강승식 교수가 제시한 경제적 효율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한국형 모델로 발전할 수 있을지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소버린AI포럼은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학계, 산업계, 정책당국 간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해나가며 기술 자립과 사회적 가치 창출 사이의 균형점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나갈 예정이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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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5-08-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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