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끼리가 물가에서 놀고, 토끼와 순록이 초원에서 뛰논다. 12월 8일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 표지를 장식한 이 그림은 200만 년 전 북극 그린란드를 그린 모습이다. 오래전 과거의 그린란드는 새하얀 빙하로 뒤덮인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영국과 덴마크 공동 연구진은 그린란드 지층에서 채집한 토양 시료에서 환경유전자(environmental DNA)를 분석해, 200만 년 전 그린란드 생태계를 재구성했다. 이 연구는 인류 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DNA를 해독했다는 기록을 세웠다.
동물이 흩뿌린 환경유전자에 주목
동물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DNA를 환경에 흩뿌리고 다닌다. 사람은 하루 중에 각질과 머리카락, 땀 그리고 배설물을 통해 DNA 분자를 세상에 내놓는다. 대부분 분해되어 사라지지만, 특별한 상황에서는 장시간 보존된다. 극미량이라도 보존된다면 어떤 동물의 DNA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가령 호수에서 뜬 물의 환경유전자를 분석하면, 호수에 어떤 물고기들이 서식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환경유전자를 확보하면 당시의 생태계를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이 최근 분자생태학 분야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술로 각광받는 환경유전자 기법이다.
영국과 덴마크 공동연구진은 그린란드 최북단 북극해의 피오르드 입구에 자리 잡은 100m 두께의 퇴적층인 카프 쾨벤하운 지층에서 41개의 퇴적물을 채취했다. 이 퇴적물에서 환경유전자를 찾아내고, 16년에 걸친 해독 끝에 200만 년 전 그린란드 생태계를 재구성했다. 퇴적물이 얼음 및 영구동토층에 보존된 덕분에 200만 년 동안이나 보존될 수 있었다.

40여 명의 연구진이 숨겨진 DNA를 찾았고, 총 135종의 동식물 유전자를 발견했다. 이후, DNA를 해독하여 현존하는 동식물의 유전자와 비교했다. 환경유전자로 그려낸 200만 년 전 그린란드는 북극에서 800㎞ 떨어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보다 10~17℃ 더 따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자작나무와 포플러나무 등이 우거진 숲에서는 순록, 북극토끼, 나그네쥐, 기러기가 살았다.
이번 연구에서 코끼리의 조상인 ‘마스토돈’이 멸종 직전까지 그린란드에서 살았다는 것이 처음 보고됐다. 코끼리는 북미와 중미 등 기원지에서만 서식했다는 기존 통념을 뒤집는 결과다. 또한, 순록 DNA의 발견도 지금까지의 연구를 뒤집는 성과다. 이전까지 순록은 100만 년 전에 진화했다고 추정했는데, 이번 연구를 통해 200만 년 전에도 순록이 살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커트 카이어 덴마크 쾨벤하운대 교수는 “DNA 추출 및 시퀀싱 장비의 놀라운 발전 덕분에 매우 작고 불안정한 DNA 파편을 식별하고, 200만 년 된 생태계의 지도를 그릴 수 있었다”며 “분석한 DNA 중 현생 종의 DNA 분류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추가 분석하면, 다양한 종의 진화에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단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진화 연구의 판도를 바꿀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다. 가장 오래된 동물 DNA 해독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DNA 분석 기록은 약 100만 년 전이다. 스웨덴 고유전학연구소 연구진이 시베리아에서 발굴한 매머드 화석에서 165만~110만 년 전 DNA를 찾아내 해독했다. 이번 연구가 약 100만 년의 역사를 추가로 연 셈이다.
에스케 윌러슬레브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DNA는 빠르게 분해되지만, 특별한 여건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더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만 년 전 DNA에게 온난화 대응 비결 찾는다
연구진은 200만 년 된 동식물의 DNA로부터 기후변화에 대응하며 생존하는 비결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공동 제1저자인 미켈 페더슨 덴마크 코펜하겐대 교수는 “우리가 추정한 200만 년 전 그린란드 기후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변할 그린란드의 미래 기후와 유사하다”며 “극심한 기후 변화를 견뎌 온 동식물의 DNA를 통해 온도 상승으로 인한 생태계 변화에 생명체가 어느 정도까지 적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생각보다 더 많은 생물 종이 급변하는 기온에 잘 적응해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연구로 밝혀졌다”면서도 “오늘날의 온난화는 속도가 너무 빨라 과거처럼 생물 종이 적응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에 연구진은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등 유전공학 기술로 과거 식물의 유전자를 오늘날의 작물에 도입하면 기후변화에 대응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현재 연구진은 이번에 발견한 박테리아와 곰팡이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미생물 DNA를 추가로 분석하여 광범위한 고대 그린란드 생태계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 고대 그린란드 북부에 서식했던 동식물과 미생물 간 상호작용이 그린란드 생태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추가 논문도 발표를 앞두고 있다.
한편, 연구진은 환경유전자 분석 기술을 활용하면 인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지식까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윌러슬레브 교수는 “DNA 보존 여건이 좋은 아프리카 이탄층 등에서 환경유전자를 분석한다면 다른 종의 기원에 대한 획기적인 결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어쩌면 최초의 인류와 그 조상에 대한 지식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권예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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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2-12-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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