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모스크바 주에 위치한 모니노 중앙 공군 박물관에는, 항공기라기보다는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뭔가 괴상한 탈것의 잔해가 있다. 관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고 빛바래고 녹슨 흉물스런 모습의 이 항공기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항공기는 구소련이 야심 차게 개발했던 수직이착륙/수륙양용 WIG 항공기인 VVA-14의 시제기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에게는 새로운 두통거리가 생겼다. 바로 미국의 폴라리스 탄도미사일 탑재 전략 원자력 잠수함들이었다. 이들 잠수함들은 소련 근해에 머물러 있다가, 유사시 바로 소련 본토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었다. 더구나 소련의 해안선은 무려 70,000km로 지켜야 할 영해 면적이 엄청나게 넓었다. 유사시 이들 미국의 전략 잠수함들을 조기에 발견해 격파하려면 기존의 것보다 더욱 긴 체공시간과 항속거리, 빠른 속도를 가진 대잠 항공기가 필요했다.
이 문제에 대해 참신한 해답을 들고 나온 인물이, 소련의 항공기 설계사 로베르트 바르티니였다. 이탈리아 출신이던 그는 WIG선, 즉 지면효과를 이용한 배가 소련이 처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발상에서 그가 설계한 것이 바로 이 VVA-14였다. VVA는 수직이착륙 수륙양용기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вертикально взлетающая амфибия의 약자 вва를 라틴 알파벳으로 옮긴 명칭이다.
바르티니가 설계한 VVA-14의 사양은 매우 호화로웠다. 우선 이것은 단순한 WIG선이 아니었다. 필요할 경우 재래식 항공기와 마찬가지로 정식 비행(순항 고도 최대 33,000피트)도 가능했다. 때문에 VVA-14는 지면효과를 높이기 위한 쌍동선식 동체는 물론, 일반 항공기와 같은 주익도 달려 있었다. 주엔진은 솔로비에프 D-30M 터보팬 엔진 2대로, 대당 추력은 15,000파운드였다. 이 두 엔진으로 시속 760km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또한 이 항공기는 지상과 수상에서 모두 이착륙이 가능했다. 지상 이착륙은 재래식 착륙장치로, 수상 착륙은 공기팽창식 부구를 사용했다. 또한 수직이착륙 기능도 있었다. 수직이착륙에는 12대의 리빈스크 RD-36-35PR 터보팬 엔진을 사용할 것이었다. 비행제어는 컴퓨터로 진행되는 플라이 바이 와이어식이었다. 본연의 개발 목적인 대잠전 수행을 위한 각종 항법 장치와 잠수함 탐지장치, 그리고 2톤의 대잠 무장도 탑재 가능할 것이었다.

엄중한 보안을 위해 소련군이 아닌 민간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도장이 칠해진 시제기는 1972년 9월 첫 비행했다. 바르티니는 총 3가지의 시제기를 만들 계획이었다. 첫 시제기인 M1에서는 공기역학적 성능과 부구의 성능을 시험하고, 두 번째인 M2에서는 수직이착륙 성능, 비행제어장치의 성능을 시험, 세 번째인 M3에서는 무장 탑재 성능, 표적 탐지 및 공격 성능을 시험하려 했다.
그러나 첫 시제기인 M1이 2대 완성된 후에도, 수직이착륙용 엔진 RD-36-35PR의 개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VVA-14는 최대 이륙 중량이 무려 52톤에 달했던 대형기였다. 이만한 덩치를 수직으로 띄우고 내릴 수 있는 엔진의 개발이 쉬울 리가 없었다. 해당 엔진 개발진은 이만한 성능을 가진 엔진을 완성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설상 가상으로 M1에 달려 있던 팽창식 부구의 성능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팽창식 부구를 고정식 부구로 교체하고, 주엔진을 추가 장착해 재래식 수상 이착륙만이 가능하게끔 M1을 개조했고 이 모델을 M1P로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행제어 및 항공전자 개발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 개발이 난항에 빠졌다.
개발자인 바르티니는 RD-36-35PR의 완성을 기다리다가 1974년 타계했고, RD-36-35PR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바르티니의 타계 이후 VVA-14 프로젝트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다가, 결국 1987년 잔존한 시제기 1대가 퇴역하여 현재의 모니노 중앙 공군 박물관에 이관되는 것으로 완전히 종결되었다. 시제기의 시험비행 시간은 불과 103시간이었다. VVA-14 프로젝트가 종료된 이유 중에는 개발자의 사망도 있었지만, 용도가 너무나 한정적인 항공기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기술적인 난이도는 높았는데, 그렇다고 무장을 많이 싣거나 대잠전 외에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항공기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용두사미로 끝난 VVA-14 프로젝트였지만, 흥미로운 뒷이야기도 있다. 1970년 바르티니는 VVA-14를 확장한 5,000톤급 WIG 항공모함의 기획안을 소련 해군에 제안했다. 함재기 25대를 싣고 시속 600km를 낼 수 있는 이 항공모함이 만약 완성되었다면, 전 세계 어디든지 소련의 해군 항공력을 신속히 파견할 수 있는 전략 자산으로서 미국의 요주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수십 년간 제대로 된 관리 없이 박물관에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던 VVA-14는 지난 2013년부터 느리게나마 수리 및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잘하면 2020년대 이내에 이 항공기의 멋진 원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이동훈 과학 칼럼니스트
- enitel@hanmail.net
- 저작권자 2021-10-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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