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어렸을 때 차별 대우나 학대를 받으면 ‘마음의 상처’가 돼, 성인이 되었을 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최근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지위가 낮을 때 받은 스트레스는 몸에 ‘분자 기억(molecular memory)’으로 각인돼 지위가 높아졌을 때도 그 흔적이 나타난다는 연구가 나왔다.
미국 듀크대와 시카고대(UChicago) 협동 연구팀이 국립과학원회보(PNAS) 14일 자에 발표한 이 연구는 스트레스가 심한 사회적 체험이 유전자에 반영돼 어떻게 건강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밝혀내 주목된다.
사회의 하위 계층 사람들은 맨 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보다 수명도 짧고 건강도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의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하위 계층에서 겪는 스트레스는 지위가 높아져도 회복되지 않는 장기적인 건강 상의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즉, 사회 계층 순위가 올라간 뒤에도 세포 수준에서 여전히 한때 계층이 낮았을 때의 영향을 나타낸다는 점을 시사한다.

‘전입 고참’순으로 서열 이뤄
연구팀은 미국 애틀란타 여키스 국립영장류센터에 있는 암컷 히말라야 원숭이(rhesus macaques) 45마리를 대상으로 장기 연구를 실시했다.
원숭이들을 한 우리로 모았을 때 이들은 모두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서열이 정해질 때까지 서로 다퉜다.
지배적인 암컷들은 일반적으로 음식과 공간을 먼저 차지하고, 자주 털 손질을 하며, 누가 보스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다른 원숭이들을 주변으로 밀어내는 등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한다. 반면, 하위 서열 암컷들은 길을 비켜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실험 초기에 연구팀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관계성이 없는 암컷들을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하나씩 서로 소개했다. 원숭이들은 그룹에 먼저 들어온 원숭이가 신참자를 앞서는 순서로 서열을 분류했다.
늦게 들어온 ‘신참자(newbie)’는 불가피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자신의 입지를 고수하는 대신 몸을 웅크리고 뒤로 물러났다.
원숭이 서열 뒤바꾼 뒤 혈액 검사
이런 상태에서 연구팀은 1년 뒤 모든 것을 바꿔 보았다. 그룹들을 뒤섞어서 원숭이들을 다른 순서로 다른 우리에 하나씩 들여보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 질서가 생겨났다.
그룹이 바뀌자 새 그룹 안에서 원숭이들의 지위도 변경됐다. 이전에 다른 그룹에서 하위에 있었던 일부 원숭이들은 좀 더 지배적인 위치로 올라갔고, 다른 일부 원숭이들은 지위가 내려가 더 복종적인 위치에 있게 되었다.
연구팀은 이렇게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원숭이들의 서열을 바꾼 뒤 원숭이들의 피를 뽑아 분석했다.
이들은 2016년 원숭이들의 서열 순위가 혈액세포 내 수천 개 유전자, 특히 감염과 맞서 싸우는 면역 유전자가 켜지고 꺼지는데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발견해 발표한 바 있다.
낮은 서열 원숭이들에서 많은 유전자들은 마치 자동차를 증속 기어에 고정한 것처럼 미생물 침입자들에 의해 면역계가 쉽게 흥분되는 방식으로 ‘고착돼(stuck)’ 있었다.
이전 지위가 3735개 유전자에 영향 미쳐
이번의 새로운 연구 결과는 원숭이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사회 계급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과거의 계급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연구팀은 원숭이의 지위가 나중에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관계없이 이전의 사회적 지위가 여전히 3735개의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논문 공저자인 시카고대 루이스 바레이로(Luis Barreiro) 부교수(진화생물학, 인간유전체학)는, 사회적 사다리에서 한두 계단 아래로 떨어진 원숭이들은 유전자도 퇴보하는 결과를 나타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원숭이들의 지위가 올라갔을 때에도 지위가 낮았을 때 겪었던 괴롭힘이 여전히 면역 유전자에 영향을 미쳤다.
논문 공저자인 듀크대 제니 텅(Jenny Tung) 교수(생물학, 진화인류학)는 “우리 모두는 짐을 안고 있다”며, “이번 연구 결과는 우리 몸이 과거의 사회적 낮은 지위를 기억하고 있고, 과거에 상황이 정말 좋았다고 가정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텅 교수는 이것이 “성인이 되어서조차 ‘생물학적 각인(biological embedding)’ 과정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 김병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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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9-10-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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