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총리 선거가 임박했다. 선거를 좌우할 수많은 쟁점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지만, 영국에서도 과학은 그리 큰 쟁점으로 주목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과학 기술에 관한 한 삶과 직결되지 않은 것이 없고, 미래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없다.
유전자 식품이나 인공수정, 차세대 에너지, 지구 온난화 문제는 진부한 과학 논제로 비쳐질지 모르나 영국 정부의 과학 정책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로서 간과될 수 없는 문제다.
노동당의 3기 집권이 거의 확실한 가운데 치러지는 이번 선거에서 과학에 대한 각 정당의 입장 차이는 별반 뚜렷하지 않다. 현 총리인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과 마이클 하워드를 중심으로 한 보수당, 그리고 찰스 케네디의 자유민주당이 저마다 각 분야 정책을 내놓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곤 하지만, 과학 분야에 있어서만큼 이들 세 주요 정당의 정책은 일치하는 점이 많다.
과학 교육
우선 영국 과학의 총체적 문제로 ‘과학 교육’을 꼽는 데는 이견이 없다. 수많은 어린이들이 열살 정도에는 공룡과 우주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가도 영국의 ‘내셔널 커리큘럼’을 1,2년 배우다 보면 어느새 ‘반과학적'이 돼버린다고 비판하는 보수당은 어떻게 학생으로 하여금 과학을 전공하고, 직업으로 선택할지 구체적으로 장려할 수 있는 모델을 제시하라고 촉구한다.
최근 지식인과 젊은이 사이에 인기가 더욱 오르고 있는 찰스 케네디의 자유민주당도 열정 없는 현 과학 교육의 문제를 꼬집는다. 가장 큰 문제는 중등학교에서 과학 전공자가 교육을 담당할 수 없을 만큼 교사 수급에 문제가 있어서, 많은 아이들 특히 여학생이 과학에 흥미를 갖거나 미래에 과학을 직업으로 선택하도록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동당은 과학 교육이 실험이나 관찰 등에서 좀더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이 되어야 하며, 단순히 보수가 더 낫거나 좋은 경력으로서 과학을 선택하게 해선 안된다는 과학교육관을 피력한다.
최근 유전자에 의한 아기 성별 선택이 가능해져 윤리적 문제가 쟁점화되고 있는 가운데 각 정당에서도 조심스런 입장 표명이 있었다. 하지만 세 정당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윤리적 이슈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예컨대 딸 세명 있는 부모가 아들 하나를 원할 때 성별 선택은 가능하다. 물론 아들 셋이 있을 때 딸 하나를 원하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아기의 성별 균형을 위해 유전자에 의한 성별 선택은 나쁘지 않다는 것이 보수당의 견해다. 노동당은 유전자 선택이 곧 성별 선택은 아니며, 민감한 문제에 관해선 좀더 논쟁이 필요하다는 유보적 입장이면서도 아기가 태어난 이후에 결점을 보완하려 애를 쓰고 있는데, 왜 아기가 태어나기 이전 결점이 발견됐을 때 고치면 안되는지부터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자유민주당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사람들은 이미 결혼 때부터 상대를 고르면서 피부색과 신체에서 태어날 아기의 조건에 대해 선택하고 있는 셈이며, 이 점에 있어서 지나치게 까다롭지 않아도 되리란 입장이다. 이미 인공수정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유전자 성별 감별을 막는다는 것은 일일이 경찰이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지 않고선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노 기술과 우주 개발 정책
나노 기술에서부터 우주과학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과학의 논제에서도 세 정당의 입장은 비슷하다. 나노 기술이 윤리나 보건의 입장에서 논의가 분분한 건 사실이다. 예컨대 나노 입자를 이용한 약물이나 환경 조절 기능에서 미래에 초래할 지 모를 어떤 위험이 있지는 않는가, 나노 입자를 통한 개인 정보의 통제와 조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나노 기술이 영국에 있어 경제적으로나 의료보건에서나 크나큰 혜택을 주리라는 점에서는 각 정당간 이견이 없다. 다만 기술 개발에 있어서 일반인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노동당), 사람들에게 나노 기술이 가져올 잠재적 기술혜택에 대한 확신을 주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자유민주당) 등을 강조한다. 기술의 발전과 일상생활의 적용은 그 부정적 요소보다는 긍정적 요소가 더욱 타당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막대한 투자가 요구되는 우주 개발과 우주과학에 대한 정책에서는 영국 정치인들 모두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지금 논의는 영국이 유인 우주선 발사에 대한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모아진다. 이미 영국에서 개발한 화성탐사기 비글 2호기의 실패에서 보듯 우주 탐사 기술에 대한 경제적 윤리적 문제는 많은 논점을 던지고 있다.
이 점에서 각 당 모두 유인 우주선 탐사에 영국이 투자하는 문제에 대해선 반대하는 입장이다. 현재 노동당에서 우주 과학에 대한 입장은 세가지다. 첫째, 세계적 수준의 과학 둘째, 상업적 가능성, 셋째, 지구 관찰과 탐험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굳이 유인 우주선 탐사가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민주당 역시 우주에 인간이 가는 것과 우주 과학 기술의 발전과는 별개라는 입장이다. 즉 우주 개발에 있어 세계적 수준의 기술 개발은 하되, 인간이 직접 우주선을 타고 탐사하는 위험을 비용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감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과학 분야에서 최대의 핵심은 새로운 차세대 에너지에 관한 문제로 모아진다. 노동당의 재집권이 거의 확실한 가운데 노동당이 핵 에너지 프로그램을 발표할 것이란 소문이 안팎으로 나돌고 있다. 토니 블레어와 정부의 과학 자문위원인 데이비드 킹은 핵 에너지에 긍정적이다.
2010년까지 핵 연료를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0%를 감소하겠다는 목표지만, 핵 발전소를 설치하는 문제와 핵 폐기 처리 비용 등 만만찮은 걸림돌이 도사리고 있다. 또 핵 연료 반대자들은 단지 전력 발생 비용만을 계산할 것인가, 발전소의 건설과 폐기물 비용, 보험에 따르는 엄청난 자본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현 정부의 핵 연료 정책에 관한 의문은 수없이 일고 있다.
하지만 보수당도 핵 에너지 발전소 설치에 반대하지 않고 있고, 자유민주당은 핵 연료 시설을 건설하는 데는 반대하지만 핵 에너지 자체에는 긍정적인 입장이다.
차세대 에너지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지구의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블레어 정부의 과학 자문위원 데이비드 킹은 "기후 변화가 테러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기후 변화에 관한 정책은 현정부의 ‘실망스런 정책 목록’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문제는 다른 야당 조차 이 사안을 그리 심각한 선거 쟁점으로 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두 야당의 정책 비전 역시 여당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야당의 기후변화에 대한 정책은 온실 가스방출을 줄일 필요성을 역설하는 ‘립 서비스’에 그칠 뿐, 그를 위해 취해야 할 구체적 단계를 언급하지 않는다.
노동당 정부는 방출량 감소를 주장하는 한편 오히려 온실 가스 방출이 가장 빠르게 확산되는 ‘항공산업’의 대대적 확장을 장려하고 있는 형편이다. 환경 문제에 관한 한 어느 정당도 신뢰할 만한 구체적 정책을 내놓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다.
영국 이익 중심의 실리 정책 경쟁
영국의 미래 과학에 대한 총체적 그림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나? 이 부분 역시 세 정당이 크게 다를 바 없이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인상이다. 보수당은 ‘과학자의 위상’을 강조하고 자유민주당도 과학 전공자들이 좋은 보수를 받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과학자가 신뢰받고 충분한 보상이 이뤄질 때, 어린이와 학생들이 과학을 계속 공부하고 직업을 삼는 매력을 주며 과학이 발전한다는 이유다. 노동당 역시 영국 과학이 규모나 우수성에 있어 미국 다음으로 세계 최고임을 자부하면서 기초 과학의 우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과학 교사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과제라고 지적한다. 최고의 과학 교사란, 실험과 교과과정 외에 최고의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교사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과학 쟁점에서 보듯 영국 정당의 정책 핵심은 ‘자국의 이익’에 놓인다. 이는 영국 과학이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과 맞물려 있다. 세계 최고의 과학 국가로서 영국의 위상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 좀더 정교하고 실리적 정책을 내놓는 것으로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런던 = 김지원 통신원
- 저작권자 2005-05-0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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