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슐린. 테스토스테론. 에스트로겐.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고 있는 호르몬을 말해보라고 하면 위의 세 가지가 가장 많이 언급되지 않을까. 어쩌면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이 호르몬인지 모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테스토스테론이 남성호르몬이고 에스트로겐이 여성호르몬이라는 건 다들 알 것이다. 실제 테스토스테론은 대부분 고환에서 만들어지고 에스트로겐은 대부분 난소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우리 뇌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에스트로겐이 꽤 존재한다. 특히 시상하부, 편도체, 해마, 대뇌피질에서 수치가 높다. 여성에 비해 남성은 혈중 에스트로겐 수치가 상당히 낮은데(여성호르몬이므로 당연하다) 유독 뇌에서 비슷하게 존재한다는 건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뉴런(신경세포)이 직접 에스트로겐을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미스터리는 풀렸다.
그렇다면 뉴런은 왜 에스트로겐을 만들까.
미국 오거스타대 연구자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뇌(forebrain)의 뉴런이 에스트로겐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게 유전자를 조작한 돌연변이 생쥐를 만들었다. 즉 테스토스테론을 에스트로겐으로 바꾸는 효소인 아로마타제(aromatase)의 유전자를 고장낸 것이다.
돌연변이 생쥐의 뉴런에서 만들어지는 에스트로겐의 양은 정상 생쥐의 20~30%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뉴런이 에스트로겐을 제대로 만들지 못할 때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길까.
학습 및 인지 능력 떨어져
연구자들은 해마가 관여하는 공간 학습 및 기억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생쥐들에게 반즈미로과제를 실시했다. 반즈미로(Barnes maze)는 가장자리에 구멍이 20개 뚫려 있는 원형 테이블로, 구멍 가운데 하나만 밑으로 통하는 진짜이고 나머지는 막혀 있다. 테이블 위에 생쥐를 올려놓고 강한 조명을 비추면 불안을 느낀 생쥐는 탈출하기 위해 구멍을 탐색한다.
정상 생쥐의 경우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겪어 탈출하는데 시간이 3분 정도 걸리지만 3일차에는 30초 만에 벗어난다.
반면 돌연변이 생쥐는 첫날은 비슷했지만 3일차에는 벗어나는데 1분 30초나 걸렸다. 그만큼 공간 학습과 기억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이런 경향은 암수 모두에서 나타났다.
다음으로 역시 해마가 관여하는 작업 기억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신물체탐색시험을 실시했다. 생쥐는 낯선 물체를 만나면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거리는 탐색 행동을 한다. 연구자들은 똑같은 물체 두 개가 놓여 있는 공간에 생쥐를 5분간 둔 뒤 다음날 그 가운데 하나를 비슷한 크기의 다른 물체로 바꾼 뒤 탐색 행동을 관찰한다.
전날 일을 기억한다면 생쥐는 처음 본 물체를 더 오래 탐색할 것이다. 실제 실험 결과도 바뀐 물체를 탐색한 시간이 평균 9초로 전날 본 물체의 3초보다 세 배나 길었다.
그러나 돌연변이 생쥐는 암수 모두 두 물체에 대한 탐색 시간에 차이가 없었다. 즉 전날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시냅스 제대로 형성 안 돼
그렇다면 뉴런에서 에스트로겐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돌연변이 생쥐는 뇌 구조에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 연구자들은 뉴런 사이의 연결, 즉 시냅스를 만드는데 필요한 수상돌기 가시(dendritic spine)의 밀도를 조사했다.
그 결과 수컷 생쥐의 해마에서 수상돌기 가시의 밀도가 28%가 낮았고 피질에서도 26% 낮았다. 암컷 생쥐는 영향이 좀 더 커 해마에서 수상돌기 가시의 밀도가 33%가 낮았고 피질에서는 32% 낮았다.
이처럼 인프라가 부실하면 시냅스를 제대로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 시냅스의 개수를 알아본 결과 수컷 생쥐는 정상에 비해 33% 적었고 암컷은 절반도 채 안 됐다. 이 결과는 에스트로겐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생쥐가 학습과 기억 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이유를 잘 설명한다.
사실 연구자들은 이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했다. 에스트로겐이 관여하는 유방암의 경우 아로마타제 억제제를 쓰면 효과가 있다. 그런데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 가운데 기억 장애를 부작용으로 호소하는 경우가 있다. 난소에서만 아로마타제를 억제해 (유방에 작용하는) 에스트로겐을 만들지 못하게 하면 좋을 텐데 뉴런에서도 작용해 (시냅스 형성에 작용하는) 에스트로겐도 못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노화 과정에서도 뉴런의 아로마타제 활성이 떨어져 에스트로겐이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는 게 나이가 들수록 인지력이 떨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도 언급했다.
비록 동물실험이지만 암컷이 뉴런의 에스트로겐 저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여성이 치매에 걸릴 위험성이 더 높은 이유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도 뉴런의 아로마타제 활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약물이 개발된다면 신경퇴행성질환을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번 연구결과는 ‘신경과학저널’ 2월 6일자에 실렸다.
-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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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9-03-0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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