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선천성 적록 색맹을 영어로는 ‘돌터니즘(Daltonism)’이라 한다. 원자설을 수립해 근대 화학을 개척한 화학자 존 돌턴의 이름에서 유래한 용어다. 학자들이 이 같은 이름을 붙인 것은 돌턴이 색맹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안 돌턴은 색맹 연구에 매달렸으며, 색맹의 원인이 눈 유리체 속에 푸른색 물질이 있어 붉은빛을 차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그의 가설은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
인간이 색깔을 자세히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망막 위에 존재하는 약 700만 개의 원추세포 덕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세 종류의 원추세포를 지닌다. 빨강, 녹색, 파랑색의 가시광선을 인식하는 적추체, 녹추체, 청추체가 바로 그것.
이 세 종류의 원추체 중 하나에 이상이 있어 단 두 종류의 원추세포만을 가진 이가 색맹이다. 색맹 중 가장 흔한 경우는 녹색을 인식할 수 없는 녹색각 이상과 빨강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적색각 이상이다. 또 특이하게 세 종류의 원추세포에 모두 이상이 생겨서 색깔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전색각 이상도 있다.
한 종류의 원추세포는 대략 100가지 정도의 농담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세 종류의 원추세포를 가진 일반인들은 100의 3제곱, 즉 100만 가지의 색깔을 구별해낼 수 있다. 그에 비해 두 종류의 원추세포를 가진 색맹이 구별할 수 있는 색은 100의 2제곱인 1만 가지로 줄어든다.
2010년에 사색자의 존재 최초로 확인돼
이처럼 원추세포가 두 종류밖에 없는 이를 정상인 삼색자(三色者, trichromat)와 구별해 이색자(二色者, dichromat)라고 한다. 거의 모든 동물은 이색자이며, 인간의 색깔 구분 능력과 대적할 수 있는 동물은 새들과 자외선 영역을 감지할 수 있는 일부 곤충뿐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보다 100배나 많은 색깔을 구별할 수 있는 사색자(四色者, tetrachromat)들이 최근에 발견되고 있어 화제다. 사색자는 색을 구별하는 원추세포를 한 종류 더 가지므로 100의 4제곱인 1억 가지의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
사색자의 존재가 최초로 확인된 것은 2010년 영국 뉴캐슬대학의 신경학자 가브리엘데 조던 박사팀에 의해서다. 연구진은 색맹이 흔한 것처럼 4개의 원추세포를 가진 사색자도 흔할 것이라 생각해 연구에 착수했다.
하지만 분명히 사색자의 여건을 갖춘 이들을 연구진이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네 종류의 원추세포를 지녔다 해도 어린 시절 어떤 시지각 자극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시지각 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색자라 할지라도 특별한 훈련이나 경험을 겪지 못하면 남들과 다른 색깔 인식 능력을 지니지 못할 수 있다. 즉, 색을 감지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개인적 능력인 셈이다.
조던 박사팀은 무려 20년간의 연구 끝에 마침내 완벽한 사색자를 발견했다. 영국 북부에 사는 의사인 이 여성은 ‘cDa29’라는 실험실의 명칭으로만 세상에 공개됐다.
색맹이 X염색체가 하나뿐인 남성들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듯이, 사색자는 두 개의 X염색체에 모두 변이가 있어야 네 종류의 원추세포를 가지게 되므로 이론적으로는 여성들 중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색을 인식하는 원추세포의 유전자는 X염색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사색자
그런데 최근 새로운 또 한 명의 사색자 근황이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2012년에 사색자임이 확인된 콘세타 안티코라는 여성이다. 그림을 가르치는 화가인 안티코는 최초의 사색자와는 달리 실명 공개는 물론 자신의 이름을 딴 온라인 웹사이트를 개설해 사색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녀가 이처럼 사색자 연구에 협조적인 것은 자신의 딸이 색맹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과학전문매체 ‘파퓰러 사이언스’에 의하면, 안티코는 딸의 색맹이 자신이 돌연변이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사색자를 이해할 수 있게끔 그녀가 도울수록 색맹 연구 및 치료의 가능성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안티코를 담당하는 과학자들도 사색자들의 유전적 원리 및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그들의 시지각 능력을 이해하게 된다면, 색맹 치료를 비롯해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는 색깔의 시각적 처리에 대한 비밀을 풀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럼 사색자의 눈에는 세상이 과연 어떤 색감으로 보이게 될까. 콘세타 안티코는 나뭇잎을 볼 때 그저 녹색만 보이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가장자리를 따라 주황색과 붉은색, 자주색이 보이며, 잎의 그림자 부분에서는 짙은 녹색 대신 보라색, 청록색, 파란색이 보인다는 것. 마치 인상파 화가의 작품처럼 온 세상의 색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듯이 보이는 모양이다.
- 이성규 객원기자
- yess01@hanmail.net
- 저작권자 2016-09-2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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