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50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은 이태규(李泰圭 1902~1992) 박사일 것이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특히 화학이 학문적으로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박사는 일제시대에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화학의 첨단 분야를 연구하고, 해방 후에 귀국해서 대한화학회를 창설하고 1947년 초대회장을 맡았으며 서울대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서울대 전신인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이던 이 박사가 1946년 3월 미군청에 ‘과학기술부’ 설치안을 제출한 것은 그의 안목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의 하나로 거론되던 이태규 박사가 우리나라에 자리를 잡기엔 시기상조였다. 좌우 이념의 갈등을 피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KIST 설립 때 고문으로 추대받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1966년 설립될 때 미국에 있던 이 박사는 고문으로 추대됐다. 그리고 KIST 설립 5년 뒤 과학인재 양성을 위해 카이스트(KAIST)가 설립되면서, 조국이 부르자 주저 없이 들어와 사망할 때 까지 제자들을 길렀다.
카이스트 도서관 입구에는 우리나라 과학자로서는 유일하게 이태규 박사의 흉상이 서 있다. 그리고 도서관 밖 잔디밭에는 세종대왕 시절의 위대한 과학자인 장영실 동상이 세워졌다.
이 박사 만큼 우리나라 현대 과학자 중 많은 이야기꺼리를 낳은 사람도 흔치 않다. 과학자로서는 유일하게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만큼 존경받는 분이다. 그는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그의 인생은 굴곡지고 변화무쌍한 우리나라의 정치상황과 깊이 연관돼 있다.
1972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7·4 남북공동선언을 논의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밀명을 받고 김일성과 비밀회담을 하러 올라갔다. 이후락 부장이 김일성과 회담을 하고 나오는데, 한 노인이 오더니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태규 박사는 잘 계시냐”고.
‘이태규가 누구인데 북한 실력자가 찾는가’ 수소문을 해 보았더니, 미국 유타대학에서 연구하는 원로과학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정부는 다시 이태규 박사를 새로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다시 한국으로 귀국한 것은 1973년이었다.
이태규 박사의 안부를 물어본 사람은 이승기 박사였다. 이태규가 1931년 일본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은데 이어 이승기 역시 일본에서 193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두 사람은 해방 후 귀국해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지만, 이태규 박사는 좌우이념 대립을 피해 미국으로 갔고, 이승기 박사는 북한으로 월북하면서 운명이 나뉘었다.
이태규 박사는 20년 간 카이스트에서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제자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 박사가 사망하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는 사람 중에는 제자인 최유미 박사와 그의 생활을 돌봐 준 이종순 씨가 있다.
최유미 박사는 출산을 하러 부산에 가 있다가 ‘교수님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카이스트로 왔다. 최 박사를 보고 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너 때문에 이용태 회장에게 전화를 했어. 삼보에 갈 마음이 있니? 컴퓨터를 많이 했으니 그 분야도 괜찮겠지.”
90이 된 스승은 제자 취직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감기기운이 있던 이 박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4시쯤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온 이 박사의 마지막을 지켜본 이종순 씨는 ‘나는 과학자이다’는 책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오전, 박사님은 가벼운 감기로 병원에 다녀오셨다. 그리고 오후 5시에 집으로 퇴근하셨다. 6시에 식사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시던 박사님은 갑자기 비틀거리시더니 냉장고를 짚고 서 계셨다. ‘내가 좀 이상하다’고 하셔서 침대에 눕히고 119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도착했을 때 박사님은 운명하신 뒤였다.”
이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 박사로서, 양자역학을 화학반응 연구에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李會昌)의 둘째 아버지이기도 하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2년에 일본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 과정을 마쳤다.
1927년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1931년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화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 초청과학자로 연구하다, 미일 전쟁을 앞두고 1941년 교토제국대학으로 돌아가 양자화학을 가르쳤고 1943년에 정교수가 됐다.
해방 후 귀국해서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장을 맡았다. 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문리과대학 학장이 되었으나, 단과대학을 묶어 국립서울대학교를 만드는 정부 계획을 놓고 벌어진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연구만 하던 이 박사가 학장을 맡으면서 겪은 시간은 그를 몹시 힘들게 했다.
‘학장 감투를 쓰니까 많은 교제도 하게 되고 술도 꽤 먹고 그러다가 머리가 띵해 멍텅구리가 되는 것 같았다. 학자는 감투 쓰면 안된다고 느꼈다.’
결정적으로 서울대를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계기가 있었다. 국대안 파동 가운데 일본 교토제국대학에 있을 때부터 친자식처럼 아끼던 제자 두 명이 굳은 표정을 하고 학장실로 사직서를 들고 온 일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 화학교육에 동참하자며 선뜻 따라나선 수제자였다. 교수는 제자가 등을 돌릴 때 만큼 힘든 때는 없다.
결국 이 박사는 미국으로 오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아이링 박사의 편지를 받고 유타대학으로 옮겼다.
그러나 뒤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조국에 두고 온 가족의 생사에 잠을 못 이루던 이 박사는 고통을 잊기 위해 더욱 연구에 몰입했다. 점심과 저녁은 걸어서 5분 거리인 집에 가서 해결하고 밤에 다시 연구실에 와서 새벽 1시에 퇴근하는 일이 반복됐다. 일생을 대입 수험생처럼 연구에 매달린 것이다.
이때 연구한 유변학(rheology)은 이론화학자로서 이 박사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55년 아이링 박사와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 ‘비뉴턴 유동이론’은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공식을 제시한 것으로,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불리며 국제학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그가 미국에 있던 1962년 제자들이 회갑논문을 만들어 미국으로 증정하러 왔다. 이 박사는 대한화학회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선배 제씨와 후배 제군을 위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것과 같이 양친에게도 효도 한 번 다하지 못했습니다. 60년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오직 이 논문집에 실려 있는 자취뿐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연구한 분은 아마 없을 것"
이태규 박사는 시대와 개인의 역경을 넘고 넘어, 마침내 우리나라 과학자의 한 모범을 보인 분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유타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았으며 서울대 교수와 과기처 장관을 지낸 권숙일 박사는 “대한민국에서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열심히 연구를 한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는 말로 과학자의 길을 간 이 박사를 평가했다.
이 박사는 개인의 불행을 넘었다. 그리고 시대적인 모든 어려움도 이겨냈다. 정치적인 격랑에 휘둘릴 뻔 했을 때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연구실을 지킨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일자리를 얻기 어렵고, 나라 잃은 식민백성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 낙망한 적이 있다. 공부를 멀리 하고 술에 빠져 자고 있던 이태규에게 1년 선배인 이희준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렇게 애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자네처럼 명석한 학생이 공부를 안하면 되겠는가. 이러면 조선은 앞으로도 결코 일본을 꺾을 수 없다네.”
이 박사는 이희준을 일생의 가장 고마운 사람의 하나로 꼽는다.
시대는 변하고, 극복해야 할 목표도 달라지고, 넘어야 할 고난의 내용도 달라졌다. 그러나 개인을 넘고, 시대를 넘으며, 절망을 딛고 일어나 인내심을 갖고 달려야 하는 것은 지금도 똑같을 것이다.
이태규 박사의 제자로는 한상준 전 한양대 명예총장, 전무식 전 카이스트 교수, 최상업 전 서강대 부총장,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장세헌 서울대 명예교수, 권숙일 전 과기처장관, 김각중 경방 명예회장, 김완규 전 숭실대 교수, 이광표 중앙대 명예교수 등이 있다.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른 제자는 박사 12명 석사 24명이다.
- 심재율 객원기자
- kosinova@hanmail.net
- 저작권자 2016-05-0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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