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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리학 탄생을 주도한 과학자 윤일선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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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고종 34년) 10월 5일 일본 도쿄의 한 셋방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아기의 아버지는 갑신정변 때 친일개화파로 몰려 일본에 피신한 후 게이오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윤치오였다. 한말의 계몽사상가 윤치호는 그의 사촌형이었으며, 그의 동생 윤치소가 낳은 아들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다.

즉, 그 아기는 윤치호의 당조카이자, 후에 태어난 윤보선의 사촌형이기도 했다. 그 아기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자이자 병리학자로서 근대 의학을 우리나라에 도입하고 기틀을 만든 과학 선구자 윤일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최초로 경성제국대학 조교수가 되었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병리학을 비롯한 기초의학 전반을 기틀을 정립했다. 해방 후에는 경성대학 의학부장,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고등교육체제 정립을 주도했으며, 대한민국학술원 초대 회장, 원자력병원 초대 원장, 한국과학기술후원회 1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과학 전반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도쿄에서 자라면서 효성소학교에 다니던 윤일선은 1906년 귀국해 본가인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로 갔다. 그러다 부친인 윤치오가 대한제국 학무국장에 임명되면서 상경해 서울 정동의 일출소학교에 다녔다. 그 무렵 모친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그때부터 그는 의학자의 꿈을 자연스레 품게 됐다.

1956년 9월에 발간된 윤일선 박사 화갑 기념 논문집.  ⓒ 동은의학박물관
1956년 9월에 발간된 윤일선 박사 화갑 기념 논문집. ⓒ 동은의학박물관

1911년 경성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물리와 화학 등의 과목을 좋아했으며 자연계 현상 및 법칙에 흥미를 느껴 뉴턴과 찰스 다윈, 멘델 등의 과학자에게 심취했다.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일본 강산 제6고등학교 제3부(의학계)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다.

1919년 교토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한 그는 임상의학과 기초의학이란 선택의 갈림길에서 질병의 근원을 연구한다는 명목 하에 병리학을 선택하게 된다. 거기서 독일의 저명한 병리학자 루돌프 피르호의 제자이자 당대 일본의 유명 병리학자인 후지나미 아키라 교수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은 물론 정신적인 면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기초의학 전반의 기틀 정립

대학을 졸업한 후 모교의 의학부 병리학교실에서 조교로 취직해 대학원 과정을 밟은 그는 1925년 병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8년 3월 경성제국대학 조교수 발령을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제국대학의 교수되었으며, 이듬해 1월에는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그는 세브란스의전에 부임한 후 연구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도서관 정비의 필요성을 제기해 책임자가 되었으며, 학교 당국을 설득해 동물실험동을 신축하는 등 연구 분위기를 향상시켰다. 또한 그는 세브란스의전에 연구실 제도를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동시에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도 출강해 학생을 지도했는데, 그의 문하생들 중에서 한국 의학 각 분야의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961년 정년퇴임 때까지 그가 배출한 의학박사는 132명에 달했으며, 그가 지도한 논문도 256편이나 되었다. 그밖에도 수천여 명의 의학 석사들과 의학대학 졸업생들을 길러냈다.

1935년 국내 최초로 한국인에게서 배워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영춘도 바로 윤일선의 첫 제자였다. 당시 이 소식은 신문에서 보도될 만큼 화제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수행한 연구로 일본 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이영춘이 최초였다. 1937년 윤일선은 오스트리아 빈대학을 방문해 알레르기에 관한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는데, 거기에 자신이 지도한 이영춘의 논문이 인용된 것을 보고 크게 감격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한국인 조선의사협회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최초의 우리말 학술지인 ‘조선의보’ 창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30년 2월 한국인 의학자들이 모여 조선의사협회를 창립했는데, 윤일선은 조선의사협회의 기관지로서 순수 한국어 학술지인 ‘조선의보’의 첫 편집인으로 활약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이 만든 의학 종합학술지인 조선의보는 계간지로 발간되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의 유명 대학도서관과 의학단체에 보내졌는데 해외로 보내진 곳만 50여 곳이 넘었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 학자들의 주요 활동 및 친목 모임을 주관했던 조선의보는 1938년 손기정 선수의 혈액검사 결과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폐간되었다.

윤일선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영문 유수 국제학술지인 ‘Cancer Research’에 한국인의 암에 대한 통계를 발표함으로써, 국제 의학계에 우리나라를 처음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발생하는 기생충병인 휠라리아증(상피병)과 악성종양을 연구하면서 병리학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과학 전반의 발전에 이바지해

1954년 3월 조교수 이상의 투표로 서울대학교 부총장에 취임한 그는 1957년 7월에는 교수 200명 중 181명의 찬성표를 얻어 제6대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즉,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직접 선출한 최초의 비 관선 서울대학교 총장이었던 것이다.

서울대 총장 재직 중 그는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와의 자매결연을 추진하는 한편 ICA(미국 국무부의 국제협조처)의 원조를 얻어 건물을 증축하고 연구시설을 도입하는 등 한국전쟁 후의 서울대학교 정상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54년 석학 기구인 대한민국학술원이 국가 기구로 창설되면서 그는 초대 회장이 되어 1960년까지 재직했으며, 1967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창설한 과학기술후원회(현 한국과학창의재단)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1963년 국내에 원자력 의학이 처음 도입되면서 원자력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원자력 치료에 대한 연구 및 지원에 힘써 원자력 치료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64년과 196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된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에 두 차례나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그밖에는 그는 유네스코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위원장, 1971년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을 지내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한국 과학기술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이바지했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지만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87년 6월 22일 서울 노량진의 자택에서 향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89년 제자들에 의해 아산 원남리에 위치한 그의 묘소 근처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2011년 8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5-02-0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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