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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학 교육의 기틀을 세운 과학자 조백현 (하)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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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고등농림학교에 강사로 부임한 조백현은 조교수를 거쳐 30세에 교수로 승진했으며, 생화학·토양학·발효학·유기화학 등 농화학 분야의 강의를 담당했다. 1944년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개칭되었는데, 해방을 맞이한 1945년 9월 30일 조백현은 그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미군정청에서 해방 직전에 부임했던 수원농림전문학교의 일본인 교장에게 학교를 조백현에게 인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 후 수원농림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일본인 교수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정상수업이 불가능한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한 조백현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한국인 교수진을 모아 1946년 10월 15일 정식으로 개교하는 서울대 농과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6·25전쟁이 채 끝나기 전인 1952년 10월 그는 유네스코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자연보존 연구 및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당시 그가 전공으로 했던 토양학 분야에서는 토양 보존 문제가 국제학계의 이슈로 대두되었는데, 개간에 따른 토양 침식 및 토사 유실, 그리고 먼지에 의한 피해가 많았다. 그에 따라 유네스코에서는 특히 토양 보존이 잘 되어 있던 유럽에서 토양 보존 연구 및 시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다.

서울대 농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할 때 집무실에서의 모습.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서울대 농과대학 학장으로 재직할 때 집무실에서의 모습.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당시 조백현은 영국의 농과대학 및 토양연구소에 머물며 새로운 분석 기술을 익혔다. 그 후 덴마크와 서독, 프랑스 등지에 들러 7개월 만인 1953년 5월에 귀국했던데, 그 같은 외국 시찰은 서울대 농과대학의 시설을 확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가 돌아온 후 서울대 농과대학은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의 원조로 불에 탄 교사를 다시 짓고 실험기구를 새로 외국에서 들여올 수 있었다. 조백현은 유럽에서 보고 온 새로운 연구시설 및 실험기구로 현대식 연구 실험실을 꾸몄다.

1955년부터는 미국 정부의 예산으로 미네소타 대학이 서울대의 재건을 위해 지원해주는 ‘미네소타 플랜’이 시작되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5개월간 미국의 대학 및 연구기관을 둘러보고 온 조백현은 미네소타 플랜에 따라 신관 교사를 짓고 강당을 세웠으며 연구실과 실험실을 만들었다.

한국농학회 초대회장으로 선임돼

미네소타 플랜은 특히 공대 및 의대, 농대 등의 기술교육에 중점을 두어 실행되었는데, 당시 이 계획을 통해 농대에 투입된 기술관계 원조액만 해도 120만 달러에 달할 정도였다. 그 자금으로 서울대 농과대학은 기숙사 및 식당, 도서관, 강당, 신관교사 등의 시설을 새로 짓고, 교수들의 외국 유학도 활발해졌다.

그처럼 시설이 확충되고 미국에 다녀온 교수들이 차차 귀국함에 따라 서울대 농과대학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일본식 농학에 머물러 있었던 농학이 구미의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시설로 면모를 일신함에 따라 서울대 농대는 당초 농학과 등 8개과에서 잠사학과, 농가정학과, 농교육학과가 증설되어 11개 학과를 둔 현대식 농학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그는 농학과 관련된 학회의 탄생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54년 4월 발족한 한국농학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서울대 농대에서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1967년 토양비료학회장, 1972년 식품과학회장 등을 지냈는데, 이들 학회 회장 자리 역시 처음 만든 학회들의 첫 회장이었다.

1961년 서울대 농과대학 학장직에서 물러난 그는 강사로서 연구생활을 이어갔다. 행정 업무에서 벗어난 그는 당시 학계의 관심거리였던 원자력의 농학이용 연구에 몰두해 바로 그해 하와이에서 열렸던 제10차 태평양과학회에서 연구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부터 20만 달러에 상당하는 연구장비 및 방사성동위원소 등을 지원 받아 벼농사에서 가장 효율적인 시비(施肥)의 위치 및 시기 등을 알아내는 연구과제를 맡았다. 2년간의 연구 끝에 그는 벼의 표층과 하층에 동시에 주는 전면 시비가 가장 효과적이며, 벼에서 비료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는 꽃이 분화하는 시기라는 사실을 처음 시험적으로 증명해냈다. 그 같은 연구결과는 1964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되었던 IAEA 국제회의에서 발표돼 적지 않은 반향을 얻었다.

원자력 기술을 농업에 이용하기 위해 노력

그는 1965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약 8년간 원자력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맡아 원자력기술을 농업에 이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그는 원자력청에 방사선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 같은 공로로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1977년에는 경방 육영회가 과학 및 산업 발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하는 수당과학상을 수상했다.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에 선임되었으며,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명예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토양의 모세관 수분이동 속도 연구’, ‘한국산 야생 식용식물의 식품적 가치 연구’, ‘전통발효식품에 관한 연구’, ‘콩나물 생장 중 성분 변화에 관한 연구’, ‘개량메주 제조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특히 ‘토양의 모세관 수분이동 속도 연구’는 흙 속에서 수분이 이동하는 속도를 실험적으로 계산하는 식을 만든 것으로서, 미국보다 13년 앞선 세계 최초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토양학’, ‘목야경영법’, 번역서로는 ‘토양학원론’이 있다.

1967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명예회장을 지낸 그는 학계를 떠나 은퇴하면서 사재로 화농장학회를 설립하여 1993년 재단법인 화농연학재단으로 발족시켰다. 화농(華農)은 바로 그의 호인데, 이 재단은 매년 농업과학 기초분야의 우수논문 발표자를 선정하여 ‘화농상’을 시상하고 있다.

1996년에는 수원의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대학(구 농과대학) 캠퍼스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는 1994년 노환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전문적인 연구자로 성장했으며, 또한 후진을 길러내기 위해 평생을 과학기술 교육에 헌신한 농학 연구자이자 농업 개혁가였다. 해방 후 급속도로 과학기술자 사회가 제 모습을 갖춰갈 수 있었던 것은 조백현처럼 자기 자리를 지키며 때를 기다렸던 과학기술자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5-01-1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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