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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업 과학화의 선구자 조백현 (상)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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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대한민국 재테크박람회’ 참석차 방한한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 회장은 구랍 4일 서울대 경영대학에서 서울대생을 상대로 강연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한 학생이 “다시 젊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자 그는 “중국에 가서 중국 여자와 결혼해 농부의 삶의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같은 대답은 지금보다 좀 더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농업이 미래의 최고 유망 업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농업이 가장 유망한 사업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당장 교실을 나가 농대로 가거나 농장으로 가라”고 외쳤다. 또한 모든 사람이 농업을 등한시할 때 역으로 농부가 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앞으로는 식량과 농경지 부족이 심해져 농업이 수익을 가장 많이 낼 수 있는 산업이 될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90년 전 일제강점기의 악조건 속에서 짐 로저스 회장의 말처럼 농업의 선구자가 된 젊은 과학자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수원고등농림학교의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농업의 과학화와 현대화에 앞장선 농학 연구자이자 농업 개혁가인 조백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서울대 농대 학장 재직시 집무실에서의 조백현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서울대 농대 학장 재직시 집무실에서의 조백현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한국 농학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인물로 꼽히는 조백현은 3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수원고등농림학교와 서울대 농대에서 교편을 잡았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농학에 뜻을 둔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또한 그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농학교육의 기틀을 다시 세웠으며 해외 선진농업을 도입해 한국 농업의 과학화와 현대화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통식품을 과학기술의 바탕 위에서 근대적 산업으로 변모시키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몸이 허약해 농림학교로 진학

조백현은 1900년 2월 3일 아버지 조성근과 어머니 황씨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 말기의 무신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친 조성근 역시 1893년 무과에 급제해 구한말에는 육군 참장을 지냈다. 일제시대 조선인으로 장군이 되어 중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고위 군인이었던 조성근은 1933년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이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난 조백현은 매동초등학교를 거쳐 1912년 보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는 부친과 달리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하고 키가 작아서 보성학교 때 친구들로부터 ‘좁쌀사위’라는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보성학교 시절 그는 수학과목에 뛰어나 졸업 후에는 공업전수학교에 가서 공학을 배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보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부친이 “그렇게 허약한 체구를 가지고는 군인이 될 수 없으니 차라리 농사기술을 배우라”며 농림학교 진학을 권했다.

평소 부친이 워낙 엄했던 터라 그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1916년 수원농림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원래 구한말에 국립으로 세워졌던 농상공학교가 한일합방 후 분리되어 수원에 설립된 우리나라 근대 농학교육기관으로서, 일제가 수원에 두었던 권업모범농장의 부설기관이었다.

즉, 지금으로 치면 초급대학 같은 곳으로서 학문을 가르치기보다는 농사기술을 익혀주는 실업교육기관이었다. 때문에 교실에서 하는 강의보다는 실습장에 나가 채소를 기르고 나무를 가꾸는 실습시간이 더 많았다.

몸이 약했던 조백현은 그 같은 실습을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차에 마침 1918년 수원농림학교가 전문부를 새로 신설하자 다시 시험을 치러 수원농림전문학교 1회 입학생이 되었다. 전문학교에서는 실습이 적어진 대신 강의 과목이 늘어나 그는 점차 학교 생활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 특히 그는 화학 과목에 흥미를 느껴 밤늦도록 화학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곤 했다.

한국인이 발표한 생화학 분야의 최초 논문

일제가 당시 그처럼 우리나라에 모범농장을 세우고 농업 기술을 도입시키려 한 것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일제의 농업 장려책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한국의 농업은 비료라야 회분이 거의 전부일 만큼 아주 열악한 상태였다. 그러니 작업량 대비 쌀의 생산량도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일제의 우량 품종이 도입되고 권업 모범농장 등의 설치로 새로운 농사기술이 보급되자 우리나라의 쌀 수확량도 점차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양보다 일제의 쌀 수탈량이 더 많아져 우리나라에는 오히려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조백현이 다녔던 수원농림학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전문학교로 개편되기 전까지 농림학교는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일제가 일자리를 주지 않아 애써 배운 농업기술을 사회에 나가서 활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학교 교사나 혹은 상업 방면으로 진출하곤 했다.

하지만 졸업 후 학업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조백현은 부모를 설득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21년 큐슈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했다. 당시 큐슈제국대학 농학부는 농학과의 단일과로 되어 있었는데, 그는 농림전문학교 시절부터 흥미를 가졌던 농예화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농예화학 중에서도 생화학은 당시 새로 개척되고 있던 첨단학문이었는데, 마침 독일 유학을 마친 젊은 일본인 교수의 지도로 그는 ‘계란 분화에 따른 아미노산의 변천’이라는 졸업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한국인이 발표한 생화학 분야의 최초 논문이었던 그의 졸업 논문은 교수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925년 3월 큐슈대를 졸업한 후 그는 전문학교에서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승격된 모교의 부름을 받고 유일한 한국인 강사로 일했다. 생화학과 조선어의 2과목 강의를 맡아 하며, 나머지 시간은 농사시험장에서 연구에 매진했다. 그 무렵 그는 우리나라 전통 식품의 성분을 규명한다는 연구 테마를 잡아 산나물을 채집해 연구실에 쌓아둔 채 성분 분석 연구에 몰두했다.

이 같은 전통식품에 대한 연구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해방 후에는 메주의 발효, 곰팡이의 분류 및 그에 따른 번식 방법, 된장과 간장 맛의 관계, 고추장의 성분 분석, 개량 메주의 제조법 등을 연구했다. 이들 연구는 전통 식품의 현대화를 통해 우리의 식품 산업이 근대적 발전의 길을 걷는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편에서 계속)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5-01-0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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