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에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에는 과학기술위성 2호와 아리랑 2호 등 우리나라가 우주로 보낸 위성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또한 러시아 소유즈 우주선과 국제우주정거장을 비롯해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최초 우주인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행된 크리스마스 실이 한국 최초의 여성 과학자이자 여의사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크리스마스 실이 세상에 처음 탄생하게 된 것은 1904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우체국에서 일하던 아이날 홀벨 덕분이다. 그는 결핵에 걸린 아동을 어떻게 도울까 고민하던 중 연말에 급증하는 우편물에 붙이는 크리스마스 실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32년 미국인 선교사 셔우드 홀이 해주구세요양원 이름으로 발행한 것이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이었다. 당시에 그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크리스마스 실에 담으려고 했지만 총독부에서 반대함에 따라 도안을 숭례문으로 바꿔서 발행했다.
하지만 그가 1940년 스파이 혐의로 일제에 의해 추방되면서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1952년 한국기독교의사회에 의해 다시 발행되었으며, 1953년 대한결핵협회가 창립되면서 크리스마스 실 사업을 맡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셔우드 홀은 1928년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운 장본인이다. 그가 이처럼 우리나라의 결핵환자들을 위해 노력한 이유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질병으로부터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던 당시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지만, 평소 이모처럼 따르던 한 여인의 죽음 이후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 여인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김점동이다.
한국인으로 초창기 서양의 과학적 의학을 제대로 공부한 선구자였던 김점동은 1876년 3월 16일 서울 정동 부근에서 가난하게 살던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해는 바로 우리나라가 강화도조약을 통해 정식으로 개국한 해이기도 하다. 그 후 우리나라는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서양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서울 정동의 가난한 집 셋째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양의학이 들어온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1884년 미국 공사관 공의로 입국한 알렌의 건의를 받아 조선 정부는 이듬해 4월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서울 재동에 설립했다.
바로 그 무렵 감리교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온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주다가 어머니인 스크랜턴 부인이 미국에서 건너오자 그해 9월부터 정동에 병원을 세워 진료를 시작했다. 그들은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뿐만 아니라 인근에 무료 진료소를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스크랜턴 부인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정동 언덕 위의 초가집 19채와 그 옆에 있는 빈터를 사들여 한국 여성을 위한 교육 기관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효시인 이화학당이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여성들의 경우 병에 걸려도 아픈 부위를 의사에게 보이는 것을 꺼려하는 풍습이 남아 있었다. 스크랜턴 모자는 이 같은 여성들을 위해 선교부에 여의사를 요청함으로써 1887년 10월 이화학당 구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이 개설됐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스크랜턴 부인과 보구여관에 의해 김점동이 의사로서의 꿈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점동의 아버지 김홍택은 정동교회를 설립한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에게 고용되어 허드렛일을 해주고 있었다. 때문에 김점동의 집안은 비교적 일찍 서양 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아펜젤러의 소개로 김점동은 1887년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
이화학당은 1885년 8월에 개설되었지만 첫 학생이 들어온 것은 그 이듬해인 1886년 5월이었다. 그것도 스크랜턴 부인이 학생의 어머니에게 학생의 신분을 보증한다는 서약서까지 주고 겨우 입학시킨 학생이었다. 여성의 신교육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때라 양반집의 자녀를 학생으로 구하기는 더 힘들어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이화학당에는 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학생으로 입학했다.
김점동도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김점동이 스크랜턴 부인을 처음 만난 날은 몹시 추웠다. 따라서 스크랜턴 부인은 김점동에게 난로 가까이 오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김점동은 그녀가 자신을 난로에 잡아넣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만큼 당시만 해도 김점동은 겁이 많은 소녀였고, 모두들 외국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던 때였다.
입학 후 신학문을 접했던 김점동은 특히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때문에 189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김점동은 그해 10월부터 보구여관에서 일하고 있던 로제타 셔우드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로제타 셔우드는 보구여관에 처음 파견된 여의사인 메타 하워드의 후임으로 부임한 여의사이자 선교사로서 김점동을 의사로서 키워준 장본인이다.
애초 김점동은 칼을 들고 수술하는 로제타의 모습을 보고는 의사라는 직업을 그리 좋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구순구개열 환자, 속칭 언청이라 불리던 10대 소녀가 로제타의 수술을 받고 정상이 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마음을 바꿔 자신도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 김점동을 기특하게 생각한 로제타는 1892년 동대문에 보구여관의 분원이 설치되었을 때 그를 데려가 약을 짓고 환자를 간호하게 했다. 바로 그해 로제타는 내한한 의사 제임스 홀과 결혼한 후 부부가 함께 평양 선교 기지의 개척자로 임명받게 된다.
동행이 필요했던 로제타는 제임스 홀이 데리고 있던 박유산이라는 청년을 김점동에게 소개했다. 둘을 결혼시켜 평양에 함께 데려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로제타의 의도대로 둘은 서로 마음에 들어해 1893년 5월 24일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들의 결혼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서양식 교회 결혼식으로도 유명하다. (하편에서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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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10-0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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