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8일 스웨덴 스톡홀름대 아울라 마그나홀의 단상에 피터 힉스 에든버러대 교수가 올라갔다. 그해 노벨상 수상자들의 대중 강연인 노벨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강연자들과 달리 원고 하나만 달랑 가지고 올라온 그는 자신이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측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를 찬찬히 소개했다.
그중에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사람의 이름도 한 명 거론됐다. 미국명 벤자민 W. 리, 바로 이휘소 박사였다. 힉스 교수는 1961년부터 힉스 입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으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1964년 이휘소 박사와 그의 스승인 클라인 교수가 입자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한 것을 보고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1964년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공로로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힉스 교수와 벨기에의 이론물리학자 프랑수아 앙글레르 브뤼셀자유대 명예교수가 201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12개의 기본 소립자와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4개 소립자, 그리고 다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하고는 1000분의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감쪽같이 사라진 힉스 입자 등 모두 17개의 소립자로 구성돼 있다.
그동안 16개의 소립자는 모두 발견됐지만 질량의 근원과 우주 만물의 생성 비밀을 밝혀낼 중요한 열쇠로 알려진 힉스 입자만은 흔적을 찾지 못해 ‘신의 입자’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2012년 7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대형 강입자 충돌형 가속기에서 힉스 입자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 데 이어 2013년 10월에는 도쿄대와 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 등이 참여한 국제연구팀이 힉스의 질량을 계산하는 한편 힉스의 스핀 값이 이론대로 제로인 것을 확인했다.
이휘소 박사는 피터 힉스 교수의 연구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소립자에 힉스라는 명칭을 붙인 장본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1967년 힉스 박사와 미지의 입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1972년에 열린 고에너지물리학회에서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한 핵력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학회에서 처음으로 그 미지의 입자에 대해 ‘힉스’라고 명명한 논문으로서, 그 후 이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 잡지 탐독해
우리나라는 아직 과학 부문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출생 물리학자 중 가장 뛰어났고, 노벨물리학상 수상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과학자로 꼽히는 이가 바로 이휘소 박사이다. 만약 그가 일찍 요절하지만 않았으면 우리나라도 노벨상 과학부문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가 되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이들이 많다.
이 박사는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1월 1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아버지 이봉춘, 어머니 박순희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인 이봉춘은 의사 면허를 가지고 있었으나 개업의 활동을 하지 않은 반면, 어머니 박순희는 자혜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다 성북구 보문동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하는 ‘자애의원’을 개업해 집안 생계를 도맡아 했다.
이휘소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어린이과학’이라는 일본 잡지를 친구 집에서 빌려 탐독할 만큼 과학을 좋아했으며, 경기중학교 시절에는 화학반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마산으로 피난 가서 위탁생 신분으로 마산중학교에 잠시 다니기도 했다.
바로 그 무렵 창원보건소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 부친이 직장에서 마산의 집으로 귀가하던 중 개울에서 발을 헛디뎌 사망했다. 그 후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옮겨오자 이휘소도 부산으로 가서 경기중학교를 졸업한 뒤 1952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그는 서울대학교 입학 후 물리학에 더 흥미를 느껴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시도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전과를 허용하지 않자 그는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아 유학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는 1955년 1월 마이애미대학 물리학과 3학년 과정에 편입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해 마이애미대학 물리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피츠버그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면서 소립자 이론물리학의 전공을 희망했다. 1958년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담당교수의 추천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클라인 교수 밑으로 들어가 공동연구를 수행하면서 1960년 11월에 25세의 나이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연구회원
이후 그는 클라인 교수의 배려로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조교수로 임명됨과 동시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되었다. 1930년에 설립된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오펜하이머, 괴델, 폰노이만 등 거장 과학자들이 거쳐한 연구소로 유명하다.
당시 고등연구원장은 오펜하이머였는데, 나이 차가 많았음에도 이휘소 박사와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해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매주 수요일에는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말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이 박사는 복잡한 수학 계산에서 비상한 능력을 지녀 연구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저녁 식사나 술자리 등의 사적 모임에는 일절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연구원들은 이 박사를 ‘팬티가 썩은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팬티도 갈아입을 시간이 없을 만큼 연구에만 몰두했다는 의미다.
이 박사는 이 무렵 만난 말레이시아 화교 심만청과 1962년 5월 워싱턴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슬하에 아들 제프리 파운틴 리와 딸 아이린 앤 리를 두었다. 결혼 직후 그는 국제원자력기구가 주최하는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에 10인의 미국 대표단으로 선출되어 참석했으며, 프린스턴 고등연구원에서 복귀하자마자 펜실베이니아대학의 부교수로 승진했고 1965년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이후 뉴욕주립대학 스토니브룩 및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등을 옮겨다니며 교수 생활을 한 그는 1973년 9월 페르미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거의 모든 이론 연구에 관여하고 실험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1974년에는 스탠퍼드 선형가속기센터의 과학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이 되었으며, 1976년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원 연구회원으로 초청되었다. 또한 바로 그 해 그는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다음편에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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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9-1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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