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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와 장영실에 얽힌 미스터리 과기인 명예의 전당 (4) / 장영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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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의 가장 큰 업적인 자격루는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자격루의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 경회루 연못의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 안에 설치되었던 것이 보루각 자격루이며, 그 동쪽의 흠경각 안에 설치된 것이 바로 흠경각 자격루이다.

1434년(세종 16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보루각 자격루는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종과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는 물시계다. 즉, 시간마다 종을 치는 요즘의 괘종시계처럼 자동시보장치가 부착된 시계인 셈이다.

당시에는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될 경우 중벌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보루각 자격루가 만들어짐에 따라 나무로 만든 인형이 자동으로 시각을 알림으로써 그 같은 책임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시실에 복원되어 있는 보루각 자격루. ⓒ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시실에 복원되어 있는 보루각 자격루. ⓒ 국립고궁박물관

자격루는 물을 저장하고 흘려보내는 항아리인 파수호(播水壺), 파수호에서 유입된 물로 시간을 측정하는 항아리인 수수호(受水壺), 12시(十二時)마다 종을 울리는 장치인 시기(時機), 1경(一更 ; 오후 7시 무렵) 이후 5경(五更 ; 오전 3시 무렵)까지 북과 징을 울리도록 하는 장치인 경점시보기구 등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파수호는 크기가 가장 큰 대파수호에서 중파수호, 소파수호를 거치며 수압과 수위를 조절해 일정한 물을 2개의 수수호로 흘려보낸다. 수수호가 2개인 것은 12시간씩 교대로 사용해 누설을 방지하기 위한 당시의 첨단 과학기술이었다. 이처럼 물이 흘러가면 그 물높이의 위치에 맞춰 각 자리마다 설치된 격발장치에서 쇠구슬이 굴러 내리며 시각을 알려준다.

그런데 남문현 교수는 무려 23년여의 오랜 연구 끝에 겨우 보루각 자격루를 복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시간이 오래 걸린 까닭은 세종실록의 ‘보루각기’에 자격루의 작동원리가 고스란히 밝혀져 있음에도 정작 안의 복잡한 기계 시스템에 대한 설명은 없었기 때문이다.

왕도정치 사상을 구현한 흠경각 자격루

또 당시 사람의 사고방식과 기준을 현대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복원작업을 더디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원인은 보루각 자격루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에 의해 다른 자리로 옮겨지면서 파수호의 위치가 잘못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같은 난관을 이겨내고 기어이 자격루 복원에 성공한 남문현 교수는 복원 과정에서 장영실과 자격루의 명성이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4년 뒤인 1438년(세종 20년)에 만들어진 흠경각 자격루는 시각을 알려줌과 동시에 천문현상도 재현하는 더욱 정교한 장치였다. 그 시각에 맞는 해와 달의 움직임을 나타내며 그에 따라 인형이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는 놀라운 과학시설이었던 것. 즉, 보루각 자격루가 국가를 유지하는 표준시계라면, 흠경각 자격루는 왕도정치 사상을 구현하는 정치 도구로서의 시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그해 1월 7일자의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든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 풍도(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흠경각 자격루는 아직 복원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이외에도 장영실이 이룩한 업적은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조선 최초의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를 축조했으며 혼천의, 대간의, 소간의, 규표,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천평일구, 정남일구, 현주일구 등의 과학기기를 제작했다. 또 한국 활자의 백미라고 일컬어지는 ‘갑인자’를 만들어 인쇄 능률을 향상시켰으며,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발명하는 데도 참여했다.

안여 파손 사건으로 인해 파직돼

그런데 장영실은 아주 이상한 사건에 휘말린 다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사라졌으며, 이후 그에 대한 행적도 묘연해졌다. 그 이상한 사건이란 1442년 3월 16일자의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안여(安輿)는 임금이 타는 가마를 말한다. 즉, 장영실이 감독하여 만든 가마가 부서졌으며, 그에 대한 조사를 마친 의금부에서 곤장 100대를 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에 세종은 장영실의 죄를 2등 감형시킨 후 곤장을 집행하고 불경죄로 직첩을 회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그동안 장영실에게 보인 세종의 태도치고는 상당히 이상한 판결이었다. 세종은 평소 강무를 할 때 장영실을 옆에 두고 내시를 대신해 명령을 전달시키기도 할 정도로 총애했다. 또 이전에 장영실이 좋지 않은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을 때에도 특별히 장영실은 다른 이들과 달리 직첩을 거두지 말게 하고 벌금형으로만 처리하는 관용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여 파손 사건의 경우 단 한 번의 실수로 장영실은 관복을 벗어야 했고, 또한 그 후로도 세종은 다시 장영실을 찾지 않았다. 임금이 타는 수레라는 특수한 정황은 이해되지만, 그만한 일로 당대의 최고 기술자를 영원히 사장시켰다는 점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문신 중심 사회에서 관노 출신인 장영실이 임금의 총애를 받는 것에 대한 질시 세력의 불만이 누적된 탓이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다.

박성래 한국외국어대학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 ‘인물과학사 1, 한국의 과학자들’에서 세종 때에 있었던 모든 과학기술상의 업적을 장영실이 주도한 것처럼 소개되어 있는 것은 증거가 부족하므로 그를 지나치게 과학영웅으로 치켜세우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지적대로 어쩌면 출생과 문책 이후의 활동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장영실의 삶에 대한 미스터리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과학기술자로서 큰 업적을 남긴 그의 삶이 우리에게 큰 교훈과 감동을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4-04-2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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