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상상력’은 예로부터 철학자들 사이에 꾸준한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대부분 플라톤의 이데아(Idea)처럼 ‘감추어진 현실’을 왜곡하고 기만하는 허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창의성’이 자신의 철학적 키워드 중 하나였던 들뢰즈까지도 “나는 꿈에서나 환상 등에서 상상의 힘을 믿지 않는다. 상상은 거의 확정되지 않은 개념이나 다름없다”며 상상력 개념에 유보적 태도를 보일 정도이다. 지난 25일, 고등과학원에서 열린 제8회 초학제 심포지엄에서 한국외대 박치완 교수가 ‘과학적 상상력과 시적 상상력의 거리’라는 강연은 이에 대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은 그 자체 평가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논리적 추론 등에 필요한 사유의 보조자였다. 물론 사유 과정에서 상상력의 역할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늘 상상력이란 활동은 과학이나 학문적 활동을 하기 전 수행하는 단계로만 치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상상에 대한 판단 역시 학문의 성과 결과에 따라 달라졌다. 훌륭한 성과에는 좋은 상상으로, 나쁜 결과에는 망상으로 이렇게 말이다. 정확히 보자면 상상력이 인간의 기본적 정신활동이란 사실 자체가 부인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상상’이란 부분에 대해 오해와 편견이 깊이 자리 잡고 있어
왜 그렇게 상상력은 평가절하 되었을까. 박치완 교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유’와 ‘상상, 상상력’을 구분하려는 데에서 오해와 편견이 일차적으로 촉발됐다”고 지적했다. 이는 국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상상, 상상력 개념을 되도록 자신의 작업 현장 가까이 두려고 하지 않은 경향을 보면 이해가 쉽다. 보통 국내학자들은 ‘객관적이다’라는 평가를 선호한다.
영미권에서는 ‘분석적이다’, ‘과학적이다’를, 독일에서는 ‘종합적이다’, ‘이상적이다’를, 일본에서는 ‘공정하다’라는 평가어를 애호한다. 그나마 프랑스에서는 ‘시적이다’라는 평가어를 즐겨 쓴다. 심지어 인문학자, 미학, 비평 영역에서는 상상, 상상력이 본질적인 개념임에도 여전히 주도적 논의에서 밀려나 있다. 이는 학문에 있어 ‘상상’이란 부분에 대한 평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 활동 영역이 지나칠 정도로 넓어서이기도 하다. 박 교수는 “생활 곳곳에서 전개되는 구체적 대상과 관련한 ‘재현적 상상력’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한 순수 창작물에 대해서는 ‘망상’, ‘허상’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이미 지배하고 있는 관념과 개념과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스통 바슐라는 “상상력은 고행을 동반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익숙함’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존재하고 있는 개념과 철학이라는 토대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 상상이라서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실재 대상인 아닌 ‘상상’에 대해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이다. 반인반마(半人半馬)인 켄타우로스라는 신화적 인물이 ‘나니아 연대기’로 영화된 것을 두고 ‘망상’, ‘허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세계관의 시각화라고 할 수 있는 무수한 기독교적 아이콘이며 불교의 관세음보살도에 대해서도 ‘허구적’이라고 평하지도 경우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과학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실재대상이 아닌데도 상대성 이론이나 힉스는 과학적이라고 평가한다. 왜 그런 것일까.
박 교수는 “창의적 상상력의 경우는 그것이 예술적 작품이든지, 과학적으로 새로운 이론이든지, 종교적인 상징화이든지 모두 새로운 세계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며 “그래서 대상 연관적이지 않은 상상력은 모두가 그 전개 방식 및 결과물이 동일한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은 ‘과학적’이고 또 어떤 것은 ‘허구적’이라는 분별은 결코 정당해보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과학적 상상력과 시적 상상력은 동일한 활동과 경로
그러나 분명 세간에서는 아직도 두 가지를 구분해 평가한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박 교수는 “상상력이라는 하나의 활동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라면서 “이는 어떤 과정과 연구 집단을 통과했는지에 따른 차이”라고 설명했다.
정리하자면 과학적 영역에서 상상적 산물이 과학적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그것이 엄밀한 이론화 과정과 실험적 검증의 과정을 통과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여타의 상상적 산물은 이론화나 검증보다는 일종의 문화적 수용조건에 부합됨으로써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 교수는 “현재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 상상력을 사유와 격이나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구분하려고 하지만 바로 이런 태도부터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며 “철학, 과학, 예술을 통합 시킨 가스통 바슐라르가 ‘객관적 과학으로서 시적 상상력’을 이제는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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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과학적 상상력에 객관적 지위를, 시적·예술적 상상력에 주관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왜곡된 분류라고 박 교수는 보고 있는 셈이다. 즉 상상하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고 생각하는 것이 곧 상상하는 것으로 둘은 결코 서로 다른 인간의 정신활동이 아니며 구분되는 활동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상상은 과학적 상상이고, 시인이 상상은 시적이고, 일반인의 상상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냥 사유 활동인 것으로, 상상과 사유는 그저 언어와 개념의 옷을 달리 입어 차이가 있는 것으로 비칠 뿐 그 활동도 그 활동의 내용이며 결과도 모두 동일한 경로를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박 교수는 “모든 인간은 ‘사유하며 꿈꾸는’ 존재로 가시적·경험적인 현실에만 얽매여 살지 않고 초월적·비가시적인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것도, 그래서 이미지와 현상의 내부, 대상의 깊이, 우주의 무한을 탐사해낼 수 있었다”며 “인간이 가능·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고 비가시적인 세계를 가시화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아직도 은연중에 깊이 남은 편견인 과학적 사고와 상상적 사고라는 이분법적 사고 자체를 먼저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 김연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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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3-10-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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