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성행위를 강요하는 성폭력(rape)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진화심리학계를 통해 제시된 '불리한 처지에 있는 남성(disadvantated male)' 가설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낮은 남성의 경우 성폭력을 감행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번식기회를 잃은 남성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적인 관계를 찾아 나선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결혼 제도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되는 셈이다.
진화심리학자인 쏜힐(Randy Thornhill)과 팔머(Craig T. Palmer)가 쓴 논문은 2001년 '자연의 강간사(A Natural History of Rape)'라는 책으로 출간돼 과학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진화심리학계와 여성계, 원인진단 크게 엇갈려
책 속에서는 '전문화된 강간자', '기회주의적 강간자' 등 다양한 유형의 성폭력 심리를 설명하면서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남성'이란 가설을 증명하려 했다.
▲ 언제 직면할지 모르는 성폭력 사태를 대비해 국민적 합의와 함께 교육 등 다양한 분야의 제도개선이 요구되고 있다. 사진은 미국 최대의 반 성폭력 기구인 RAINN 사이트. 긴급 상황을 대비해 핫라인을 개설하고 있다. ⓒhttp://www.rainn.org/
대체적으로 진화심리학계에서는 이 논문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대중들은 그렇지 않았다. 온갖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비판하면서 비난대열에 가세했다. 이 책을 '쓰레기'에 비유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한편 여성계는 진화심리학자들과는 달리 성폭력의 원인을 매우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 심리학계 학술지 사이콜로지스트 지는 1998년 12월호에서 여성학자들이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성폭력의 원인을 진단했다.
여성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형성돼 온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성폭력을 양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여성학자들은 이런 문화를 '성폭력 신화(rape myths)'라고 명명했다. 잘못된 생각이 신화처럼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성폭력 신화'는 크게 다섯 가지. 첫 번째는 여성이 성폭력을 부추긴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전통은 성폭력이 여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있다는 생각으로 성폭력이 아니고 단순한 섹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전통은 성폭력 희생자가 자신이 희생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폭력 진위를 확실히 가리기 위해 실질적인 증거(signs of injury)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으로 최근 우리나라에서 계속 문제되고 있는 부분이다.
네 번째 전통은 많은 여성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섯 번째 전통은 실제 성폭력 범죄자는 사이코패스(psychopath)들이고 나머지 경우들은 성폭력으로 보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여성학자들은 브라운밀러(Brownmiller), 러셀(Russell) 등의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러셀은 1982년 논문에서 이런 그릇된 문화가 현대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성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성폭력을 지원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비난받는 21세기 '성폭력 문화'
성폭력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지난 1980년대 들어서다. 많은 과학자들과 심리학자, 사회학자들이 달려들어 성폭력의 원인을 놓고 씨름을 벌여왔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밝혀냈다.
성폭행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신고가 안 된 범죄들은 훨씬 더 많다는 것. 성폭행범들의 절반 이상이 치밀한 계획을 세운 후 자신만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성폭행을 감행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성폭행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시간대는 오후 8시부터 새벽 2시까지라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결과들이 논란 속에 빠져 있다.
미국에서 성폭행범의 학력이 매우 낮으며, 가난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발표된 고학력 성폭행범 사례는 그 주장을 무색케 했다. 고학력의 재력가들이 교묘한 정신병리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개인적인 욕구를 해소한다는 것.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교육계에서는 스스로 성폭력을 예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학생들 스스로 성폭행 상항에 대해 지혜로운 대처를 할 수 있도록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예일 뉴헤이븐 교사협회(The Yale-New Haven Teachers Institute)는 예일대학과 지역 공립학교들과 연계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기관이다. 이 협회에서는 성폭력을 주제로 한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이 커리큘럼의 첫 번째 과정은 학생들로 하여금 성폭행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감지하도록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혼자서 밤거리를 걷는다던지, 차 안에 있으면서 문이 닫혔는지를 확인하고, 낯선 사람이 다가올 때는 그 사람과의 간격을 유지하고, 차 운전을 하면서 히치하이킹을 조심하라는 것 등등.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개인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교사협회의 입장이다. 만일 급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는 방어가 가능한지 정확히 판단한 후 대항을 하거나, 시간을 끌던지 방법을 강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