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철 막말남’ 파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20대의 남성이 70대의 노인에게 욕설이 섞인 막말을 퍼붓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나이를 기반으로 한 한국식 예절이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세대 간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 대가족 시대에는 지식과 지혜를 전수해주던 기성세대가 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한 것이 원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해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연장자가 아닌 컴퓨터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다.
미국의 교육학자 마크 프렌스키(Marc Prensky)는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환경에 친숙해 있는 새로운 젊은 계층을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라 정의했다. 미디어 비평가 돈 탭스콧(Don Tapscott)은 동일한 이름의 저서에서 “인터넷에 많은 것을 기대고 사는 넷세대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3만5천년 전에는 할아버지 덕분에 인류가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명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어메리컨(Scientific American) 최근호는 레이첼 캐스퍼리(Rachel Caspari) 센트럴미시건대 교수와 이상희 캘리포니아대 교수의 공동연구를 소개했다.
이 연구는 초기 인류의 화석을 연구한 결과, 노인 세대가 현생인류의 생존과 진화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내용이다. 모든 초점과 가능성이 젊은 세대에 쏠리고 있는 지금, 노인들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 셈이다.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호모사피엔스 장수 인구가 5배 많아
인류가 돌로 만든 도구를 사용했던 구석기 시대는 시기에 따라 각각 전기-중기-후기 구석기 시대(lower-middle-upper paleolithic)로 구분된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후기 구석기 시대에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네안데르탈인을 누르고 지구의 지배자에 등극한다.
그 비결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제각각이다. 그런데 1991년 크리슨 혹스(Kristen Hawkes) 미국 유타대 인류학 교수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수렵채집민 하드자(Hadza) 부족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노인 역할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드자 부족은 식량을 채집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할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 할머니의 지식이 풍부할수록 양육조건이 나아지면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란다. 인간이 초기 원인에서 신인류로 진화하던 시절에는 평균수명이 아이를 낳을 정도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 평균보다 오래 사는 여성들이 등장하면서 자기 딸이 아이를 가지고 출산하는 동안 채집과 육아를 도와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가 짝을 이루어 살아가는 생활형태 덕분에 장수하는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게 되었고 장수 유전자가 후대에까지 전해지면서 집단의 수명이 조금씩 연장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캐스퍼리 교수와 이상희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할아버지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논문을 지난 2004년 7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할아버지들이 도구 제작, 생존방법, 문화예술 등에 대한 축척된 지식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해준 덕분에 인류가 풍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연구진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에 이르는 다양한 인류 화석의 치아 상태를 조사했다. 대부분의 초기 인류는 할아버지가 될 만한 나이인 30세에 도달하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따금 장수를 누리는 개체도 등장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진화해 4만년 전 유럽으로 진출한 호모사피엔스에게서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30세를 넘어 장수하는 인구가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다섯 배 가까이 많아진 것이다. 캐스파리 교수는 “네안데르탈인은 10~30세 정도에 사망하는 청년 10명당 30세 넘게 생존한 고령인구가 4명에 불과하다”면서 “이에 비해 호모사피엔스는 청년 10명당 고령인구가 20명에 달했다”고 설명했다.
장수 인구 늘어나면서 지식과 문화가 전수돼
호모사피엔스의 수명이 늘어나기 시작한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다. 최근 ‘인류의 기원(The Origin of Our Species)’이라는 서적을 출간한 크리스 스트링어(Chris Stringer) 런던 자연사박물관 연구교수는 “식량 채집방식이 개선되었기 때문에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 덕분에 연장자들은 독성이 함유된 음식, 물이 풍부한 장소, 도구를 만드는 방법 등 중요한 기술과 지식을 전수해줄 수 있었다. 스트링어 교수는 가디언(Guardian)지와의 인터뷰에서 “연장자의 수가 많을수록 우물이 있는 장소, 비옥한 땅의 위치 등 소중한 정보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어 부족의 생존에 지대한 역할을 하며 유대감을 구축하는 데도 핵심이 된다”고 설명했다.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났다. 후기 구석기에는 자기표현 방식이 세련되어지고 섬세한 도구를 제작하거나 종교적인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일이 많아졌다. 도구나 예술품은 중기 구석기 때도 발견되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일례로 커티스 머린(Curtis Marean) 아리조나주립대 고고학 교수 연구진은 남아프리카의 모슬 베이(Mossel Bay)에서 16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염료와 도구를 발견했다. 몸에 색칠을 하는 데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토퍼 헨실우드(Christopher Henshilwood) 노르웨이 베르겐대 교수 연구진은 남아프리카의 블롬보스 동굴(Blombos Cave)에서 7만년 전까지 연대가 거슬러 올라가는 조개껍데기 목걸이, 산화철로 된 그림 조각, 뼈로 만든 도구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3~4만년 전 인류가 후기 구석기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이러한 예술품들이 보편화되고 풍부해졌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를 ‘창의성의 폭발’ 시기라고 부른다. 그 핵심은 인구의 고령화에 있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오래도록 살아남아 자식들에게 기법을 전수해준 것이다.
- 임동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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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1-08-0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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