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
심한 감기를 앓거나 장염에 걸렸을 때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지만, 차려진 밥상 앞에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심지어 병의 초기에는 그럭저럭 밥을 먹다가도 며칠이 지나 감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을 무렵에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지는, 이른바 ‘시간차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식욕 부진은 기생충 감염 시 나타나는 가장 흔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징후 중 하나다. 지금까지 과학계는 이러한 증상을 기생충이 숙주의 장벽에 직접적인 손상을 입히거나, 장내 미생물 생태계를 교란시켜 발생하는 불가피한 부작용 정도로 치부해 왔다. 즉, 몸이 병들어 나타나는 ‘수동적인 결과’로 여겨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 연구팀은 이 현상이 사실은 우리 몸의 치밀한 계산 아래 이뤄지는 ‘능동적인 방어 전략’임을 밝혀냈다. 장 내 상피세포들이 기생충의 침입을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이 정보를 뇌로 전달해 식탁을 멀리하게 만드는 정교한 ‘신경-면역 연합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감염병 특유의 행동 변화 메커니즘을 분자 수준에서 규명한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네이처(Nature)’ 최신 호에 게재되었다.
기생충 잡는 장내 ‘파수꾼’의 ‘핫라인’
우리 장의 내벽에는 외부 침입자를 감시하는 두 종류의 특수 세포가 있다. 하나는 기생충을 감지해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터프트 세포(Tuft cells)’로 장내 기생충의 침입을 감지해 면역 반응을 개시하는 ‘초소’역할을 한다. 다른 하나는 신경계와 소통하는 ‘엔테로크로마핀(이하 EC) 세포’다. EC세포는 자극을 받으면 세로토닌 물질을 분비하는데, 이 물질이 미주신경을 자극해 매스꺼움과 통증, 불편감을 뇌에 전달한다.
두 세포 모두 오래전부터 연구돼 각자의 역할과 기능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이들이 직접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 없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통해 이 두 세포가 ‘아세틸콜린(ACh)’이라는 물질을 매개로 긴밀하게 소통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생충이 장에 침입하면 터프트 세포가 가장 먼저 이를 감지하고, 이 비상 신호를 근처의 EC세포가 받아들여 세로토닌을 방출하는 방식이다. 세포 간의 이 긴밀한 소통은 장 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신경-면역 연합작전인 셈이다.
신경세포의 언어를 쓰는 세포
연구팀은 터프트 세포와 EC세포가 신호를 전달하는 방식이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말했다. 본래 아세틸콜린은 신경세포들이 시냅스 사이에서 정보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핵심적인 신경전달물질이다. 즉, 장벽을 지키는 면역 파수꾼인 터프트 세포가 면역계의 언어가 아닌 ‘신경계의 암호’를 빌려와 EC 세포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셈이다.
또, 연구팀은 흥미로운 반전을 발견했는데, 터프트 세포는 신경세포의 언어를 쓰면서도 정작 신경세포가 갖춰야 할 필수 장비는 하나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신경세포는 아세틸콜린을 방출하기 위해 이를 담아두는 주머니(시냅스 소포)나 전기적 신호를 만드는 통로(이온 채널)를 사용하지만, 터프트 세포에는 이러한 구조가 전혀 없었다.
제1 저자인 고키 토하라(Kouki Touhara) 박사후연구원은 “터프트 세포는 신경세포가 하는 일을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제3의 방식으로 해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신경계의 도구 없이 신경계의 언어를 구사하는 이 독특한 메커니즘은 우리 몸의 감각 시스템이 얼마나 유연하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장에서 시작된 경보, ‘신경 고속도로’를 타고 뇌로
터프트 세포의 신호를 수신한 EC 세포는 즉각 활성화되어 다량의 세로토닌을 분비한다. 이 세로토닌은 장 주변을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미주신경(Vagal afferent neurons)’의 수용체를 강하게 타격한다.
장벽에서 시작된 이 경보는 미주신경이라는 고속도로를 타고 순식간에 뇌간의 ‘고립로핵(nTS)’에 도달한다. 이곳은 우리 몸의 포만감과 거부 반응을 조절하는 관제소다. 신호를 접수한 뇌는 즉각 식욕을 억제하고 메스꺼움을 유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감염된 신체가 추가적인 음식 섭취를 중단함으로써 에너지 자원을 소화가 아닌 ‘기생충과의 전쟁’에 집중시키도록 유도하는 전략적 판단이다.
그렇다면 왜 식욕 저하는 감염 직후가 아니라 며칠 뒤에야 찾아오는 걸까. 연구팀은 터프트세포의 아세틸콜린 방출이 두 단계로 나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감염 초기, 기생충이 막 장에 들어왔을 때 터프트세포는 아세틸콜린을 짧게, 소량만 내보낸다. 하지만 이 정도 양으로는 EC세포를 충분히 깨우지 못하고, EC세포가 분비하는 세로토닌도 미주신경을 자극하기엔 너무 적다. 결과적으로 뇌에 아무 신호도 전달되지 않는다. 감염됐는데도 처음에는 별 증상을 못 느끼는 이유다. 기생충 입장에서는 이때가 몸 안에 자리를 잡기 가장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다 기생충이 성숙해 알을 낳기 시작하면 상황이 급변한다. 면역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터프트세포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늘어난 터프트세포들은 아세틸콜린을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흘려보내기 시작한다. 이 ‘지속적 누출’ 신호는 이제 EC세포를 강하게 자극하기에 충분하고, EC세포에서 분비된 세로토닌은 미주신경을 통해 뇌간까지 전달돼 식욕을 꺼버린다.
데이비드 줄리어스 교수는 “장은 위협이 일시적인지, 정말로 지속되는지를 확인한 뒤에야 뇌에 행동을 바꾸라는 신호를 보낸다”며 “이것이 감염 초기와 중기에 증상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편, 학계는 이번 연구를 통해 수십억 명이 앓고 있는 기생충 감염 문제를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전 세계적으로 토양 매개 기생충에 감염된 인구는 10억 명을 넘는다. 이들이 겪는 만성적 식욕 저하와 영양 결핍의 원인을 분자 단위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면역학자 리처드 록슬리 교수는 “터프트세포의 신호 출력을 조절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기생충 감염에 동반되는 소화기 증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치료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김현정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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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6-04-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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