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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의 탄생과 달 착륙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우주를 향한 질주가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67년 1월 27일 발사실험 도중 발생한 화재로 아폴로 1호의 우주인 세 명이 모두 산화하는 비극이 일어났었다. 우주선 기내를 100% 순수 산소로만 채웠던 탓에 일어난 이 사고는 이미 비슷한 이유로 우주인 한 명이 사망했던 소련이 철저히 비밀주의를 고수하지만 않았어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소련에서는 같은 해인 1967년 4월에 새 우주계획의 첫 주자인 소유즈 1호에 탑승했던 우주인 코마라프가 지구대기 진입 시 낙하산 줄이 꼬이는 사고로 지상에 추락하면서 사망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호 정보의 공유없이 무한경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비극적 사고에서조차 미국과 소련이 거의 경쟁하듯 타이밍이 비슷했다는 점은 기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경쟁에서 협력으로
그러나 정작 이런 수많은 난관을 뚫고 달 착륙을 성취시키고 나자 NASA의 입지는 오히려 더 불리해지게 되었다. 달 탐사가 거둔 막대한 과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자존심이 걸렸던 우주경쟁의 스릴이 사라지면서 대중의 관심도 같이 사라져갔고, 덩달아 미의회도 NASA의 예산을 지난 10년 새 최저수준으로 깎아버렸던 것이다. 영화화되기도 한 아폴로 13호의 극적인 무사귀환이 잠시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유인우주비행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1972년에 17호를 마지막으로 아폴로 달 착륙 프로그램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 후 차세대 우주 프로그램으로 NASA가 내놓은 대형 우주정거장, 영구적 달기지, 화성 유인우주탐사 등의 거창한 계획들이 미국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휴지조각이 되면서 NASA는 목표의식을 상실한 듯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의 국제적 해빙 무드 속에서 닉슨 대통령이 냉전 종식의 한 방도로 소련과의 우주협력을 추진함에 따라 냉전의 산물이었던 우주경쟁은 1975년의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계기로 우주협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같은 분위기는 1981년에 반복비행이 가능한 스페이스셔틀에 의한 유인우주비행이 재개되면서 1998년에 체결한 정부간 협정서에 의거해서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세계 15개국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국제협력 프로젝트인 국제우주정거장의 건설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유인우주비행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NASA의 파이오니어나 보이저와 같은 일련의 무인탐사선들이 명왕성을 제외한 우리 태양계 내의 모든 행성들을 탐사했다. 그리고 1990년 허블 우주망원경의 발사로 천문학 연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그 밖에 1958년 12월에 NASA의 첫 통신위성이 발사된 이래로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우주의 상업적 이용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을 뿐 아니라 NASA의 우주개발 과정은 과학기술 분야 외에도 의료, 신소재 등의 여타 산업분야에 수많은 파생기술을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우주개발의 역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해온 NASA는 이제 외계 생명탐사라는 새로운 화두를 내걸고 화성에서 물이 존재했던 증거를 최근 발견한 어퍼튜니티와 같은 일련의 탐사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한편 언젠가 화성으로 유인우주선을 보낼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그리고 더 이상 미국과 소련의 독무대가 아닌 우주개발에 유럽, 일본, 인도, 중국 등이 뛰어들면서 새로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최근 2003년 2월 1일에 일어난 스페이스셔틀 컬럼비아의 참사에서 보듯이 우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험하고 위험한 여정이다. 그래도 케네디 대통령이 40여 년 전 말했듯이 우주개발이 우리 지구의 미래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한 우주를 향한 인간의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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