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주인공 벤자민은 80세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기묘한 아기로 태어난다. 보통 사람들은 자라면서 한 살 더 나이가 드는 것과는 반대로 벤자민은 성장하면서 한 살씩 점점 더 어려진다. 한마디로 노화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노화를 겪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벤자민과 같이 역노화가 진행되는 경우는 없다. 다만 벤자민처럼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얼굴을 가진 경우는 종종 있다. 지난달 17일 영국 ‘선(Sun)’지는 8살 나이에 80세 노인의 외모를 가진 한 소녀를 소개했다.
선천성 조로증, 8살 나이 80세 할머니 얼굴선에 따르면 아샨티 스미스는 실제 나이나 성격은 또래의 초등학생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얼굴은 많은 차이를 띤다. 심각한 탈모와 주름진 얼굴 등으로 80세 할머니를 상상하게 하는 외모이기 때문이다.
아샨티가 8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80세 할머니의 얼굴을 가진 이유는 선천성 조로증인 허치슨 글리포드 프로제리아 신드롬(Hutchinson-Gilford Progeria Syndrome, HGPS)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병은 400만 명 가운데 한 명꼴로 발생하는 극히 드문 병으로 뇌 발달은 정상이지만 신체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증상을 지녔다. 대략 8살 나이에 발병해 일반인 보다 10배의 속도로 노화가 진행되며 대부분 13세를 넘기지 못한다.
선천성 조로증 환자의 대다수는 동맥경화증으로 사망한다. 과학자들은 선천성 조로증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데 조로가 정상적인 노화 연구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솔크(Salk) 연구소 후안 벨몬트(Juan Carlos Izpisúa Belmonte) 연구팀은 유도만능줄기세포(Induced Pluripotent Stem Cells, iPS) 기술을 적용해 선천성 조로증 증상을 연구할 수 있는 세포 모델을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유도만능줄기세포로 선천성 조로증 세포 재생 성공
연구팀은 선천성 조로증 환자의 피부세포로부터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재생했으며 이 줄기세포를 심혈관 노화의 징후를 보이는 근육 세포(smooth muscle cells)로 분화하는데 성공했다고 과학저널 ‘Nature’ 최신호에 보고했다.
벨몬트 교수는 “노화의 복잡성과 느린 진행은 심혈관 발병을 비롯한 노화 관련 질병에 대한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빠르게 노화하는 인간 세포 모델을 확립한 것은 노화치료에 대한 가능성을 높이는 동시에 치료제 개발을 가속화시켜 우리가 어떻게 늙은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팀은 이를 바탕으로 일반인들의 노화과정에서 수반되는 심장 질환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선천선 조로증은 치명적 희귀병으로 조기 동맥경화와 혈관 근육세포의 퇴화가 특징이다. 선천성 조로증은 라민 A(lamin A) 단백질을 암호화하고 있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유발된다.
라민 A 단백질은 세포 내에서 DNA를 보관하는 세포 소기관인 핵 안에서 단백질 얼개를 형성해 염색체 구조를 유지하며 RNA와 DNA 합성에 관여한다.
라민 A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라민 A 단백질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형태의 단백질인 프로제린(progerin)이 발현된다. 정상적인 라민 A 단백질과는 달리 프로제린 단백질은 핵 안에서 적절하게 핵 내막과 결합하지 못해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정상, 분화세포는 선천성 조로증 증상 보여
벨몬트 교수는 “정상적인 노화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또한 프로제린의 축적이 일어난다는 근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프로제린의 이 같은 특성으로 연구팀의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조로증을 포함해 정상적인 생리적 노화의 특징을 연구하는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다.
정상인의 피부세포와는 달리 선천성 조로증 환자의 피부세포는 비정상적인 핵 구조와 덜 응축된 DNA 구조 그리고 짧아진 텔로미어 등 조로증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겼다. 텔로미어는 DNA 양 끝에서 나타나는 반복되는 짧은 염기의 구조로 노화가 진행되면 텔로미어의 길이가 점점 줄어든다.
연구팀은 선천성 조로증 환자의 피부세포로부터 역분화 기술을 적용해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수립했다. 유도만능줄기세포는 피부세포가 보여줬던 노화의 흔적이 말끔히 제거된 건강한 줄기세포였다. 유도만능줄기세포는 프로제린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조기 노화와 관련된 비정상적 핵 구조나 후성유전적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라민 A 단백질은 단지 분화된 세포에서만 발현되며 배아줄기세포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연구팀은 유도만능줄기세포가 라민 A나 프로제린 단백질을 만들지 여부에 초점을 모았다. 연구팀의 실험에서 라민 A나 프로제린 모두 발견돼지 않았다. 논문의 제1저자인 구앙 후이 리우 연구원은 “라민 A가 침묵했기 때문에 생물학적 시간이 다시 세팅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팀이 유도만능줄기세포를 분화시키자 프로제린 단백질은 발현되기 시작했으며 노화의 외형적 특징이 되살아났다. 벨몬트 교수는 “유도만능줄기세포로 역분화했을 때는 프로제린 단백질의 발현이 억제되고 분화하는 동안에는 프로제린 단백질이 발현되는 것은 인간 조기 노화 연구에 독특한 시스템을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프로제린은 주로 동맥 혈관 내의 근육세포에서 축적됐으며 이는 혈관 근육세포의 퇴화와 더불어 선천성 조로증과 연관된 동맥경화의 대표적인 징후들이다. 기실 혈관 근육세포의 노화는 정상적인 노인세대의 동맥경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도만능줄기세포를 혈관 근육세포로 직접 분화시키자 노화의 특징인 비정상적 핵 구조 등이 되살아났다.
유전자 조작 유도만능줄기세포, 분화 이후에도 조로증 증상 안 보여
유도만능줄기세포가 분화이후에도 프로제린을 만들지 못하도록 유전자 조작을 하자 조작한 유도만능줄기세포는 분화 이후에도 조기 노화의 특징을 보이지 않았다. 리우 박사는 “조작한 유도만능줄기세포로부터 선구(progenitor) 세포를 이식하는 것은 선천성 조로증을 겪는 아이들의 치료에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연구팀은 또한 프로제린이 목표로 하는 효소 단백질도 발견했다. 효소 단백질의 부재는 생리학적 노화뿐만 아니라 조로증에서 이 효소 단백질의 부재가 일관되게 나타났다.
생리학적 노화에서도 효소 단백질의 부재가 나타나는 이유는 프로제린이 자연적인 노화과정에서도 축적되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자신들이 수립한 유도만능줄기세포 모델이 조로증과 생리적 심혈관 노화의 새로운 연구 모델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 이성규 객원기자
- henry95@daum.net
- 저작권자 2011-03-0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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