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 물질 세균 배양 검사 속도 ↑

페트리 대용 초미세 '젤 구슬' 개발

90여 년 전 어느 날 페트리 접시(petri dish)에 숨어들어온 곰팡이가 없었다면 항생제의 효시 격인 페니실린은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박테리아를 배양 중이던 알렉산더 플레밍이 곰팡이의 항생 작용을 우연히 발견한 게 수많은 감염 환자의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수십 종의 항생제가 개발됐지만, 인간은 아직 세균과의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기존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슈퍼 박테리아’가 다시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항생제 개발에 매달리는 과학자들이 힘들어하는 문제 중 하나가 낙후한 세균 배양 기술이다. 현재의 기술 수준이 거의 플레밍 시대와 비슷하다 보니 어렵게 후보 물질을 찾아도 항생 작용을 확인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ETH) 과학자들이 지금보다 수천 배 빨리 후보 물질의 항생 효능을 확인할 수 있는 획기적인 테스트 기술을 개발했다.

29일(현지시간) 온라인(www.eurekalert.org)에 배포된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번 연구는 취리히 ETH 바이오 시스템 공학과의 슈테벤 슈미트 박사 과정 연구원과 동료 과학자들이 수행했고, 연구보고서는 저널 ‘네이처 케미컬 바이올로지(Nature Chemical Biology)’에 실렸다. 이번 연구는 스벤 팡케 교수의 지도 아래 이뤄졌다.

원래 항생제는 천연물질로 만들거나 그 추출물을 기반으로 합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항생 효능을 확인하는 방법은 플레밍의 시대와 대동소이하다. 페트리 접시에 넣어 배양한 박테리아를 죽이면 항생제로 인정하는 식이다.

ETH 연구팀이 개발한 시험법은, 미생물이 생성하는 후보 물질의 고효율 검사에 최적화된 것이다.

슈미트 연구원은 “기존 방법으로 미생물이 생성한 항생 후보 물질 1만 건을 테스트하려면 거의 1년이 걸리는데, 새 기술로는 며칠 안에 수백만 건의 변이형을 검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페트리 접시 대용으로 ‘나노 플레밍(nanoFleming)’이라는 지름 0.5㎜의 젤 구슬을 개발했다. 플레밍이 사용했던 페트리 접시(지름 10㎝)와 비교하면 크기가 200분의 1에 불과한다. 젤을 소재로 그렇게 미세하게 만들다 보니, 거품이 넘치는 버블티나 화학적 기법으로 요리한 미식가용 캐비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크기만 작아진 건 아니다. 나노 플레밍에는 후보 물질을 생성하는 미생물과 함께 수많은 ‘센서 박테리아(sensor bacteria)가 들어 있다.

판정법도 간단하다. 후보 물질에 항균 효과가 있으면 센서 박테리아가 죽고, 아니면 센서 박테리아가 증식해 ‘세포 군집(cell clusters)’을 형성한다.

이 센서 박테리아는 형광 염료로 처리돼, 어떤 나노 플레밍에서 박테리아가 죽었는지 금방 가려낼 수 있다. 불빛이 약해진 구슬만 골라내면 되는 것이다.

연구팀은 약 6천 종의 펩타이드(아미노산 분자 물질)군을 놓고 항생 효과를 테스트했다. ‘랜티바이오틱스(lantibiotics)’라는 펩타이드 항생제 군과 유사한 것들만 골랐다.

목표는, 랜티바이오틱스의 분자 구조를 바꿈으로써 이 펩타이드 항생제의 효능을 강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학계에 알려진 세균의 항생제 저항 메커니즘을 무력화할 수 있는지 타진하는 것이었다.

생명공학 기술로 항생 펩타이드를 생성하는 미생물군을 만들어낸 뒤 나노 플레밍 테스트를 거쳐 최종적으로 11종의 펩타이드를 가려냈다. 이들 펩타이드는 종전의 랜티바이오틱스보다 적은 양으로 항균 효과를 발휘하고, 박테리아의 항생제 저항 메커니즘도 우회하는 것들이다.

슈미트 연구원은 “자연에서 발견한 미생물이 여태껏 찾지 못했던 항생 물질을 생성하는지 조사하는 데도 이 기술은 탁월하다”면서 “이제 후보 물질을 생성하는 더 많은 미생물을 더 짧은 시간에 테스트할 수 있어, 희귀한 미생물에서 항균 물질을 발견할 가능성은 훨씬 더 커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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