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 / 케빈 베이컨, 엘리자베스 슈 감독 / 폴 버호벤 제작년도 / 2000년 비디오 출시 |
<할로우맨>은 <로보캅>,<토탈 리콜>,<스타쉽 트루퍼스>등을 연출했던 폴 버호벤 감독의 작품이다. 제목의 의미 그대로 투명인간 이야기인데, '보이지 않는 인간(invisible man)'은 이미 100년도 더 전에 H.G.웰스가 썼던 명칭이므로 대신에 '비어 있는 인간(hollow man)'이라고 이름을 붙인 듯 하다. 아무튼 그의 전작SF들이 비교적 스케일이 컸던 반면에 이 영화는 주로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한 소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발달된 컴퓨터그래픽과 특수효과(SFX) 기술에 힘입어 <할로우맨>에 나오는 투명인간은 상당히 그럴듯한 과학적 설득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해서 투명인간은 비현실적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투명인간 그 자체는 가능할지 몰라도, 투명인간의 삶은 매우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묘사된 것 같은 은밀한 즐거움 따위는 거의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다.
우선 투명인간은 장님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시력에 필수적인 요소는 수정체, 망막, 시신경 등 세 가지. 외부 사물의 모습은 렌즈 역할을 하는 수정체를 거쳐 망막에 영상으로 맺힌다. 이 영상 자료를 시신경이 분석하여 두뇌로 전달하면 비로소 '보이게' 된다.
이 가운데 수정체와 시신경은 투명해도 상관이 없지만 망막은 절대로 투명해선 안된다. 외부 사물의 모습이 영상으로 맺히는 일종의 스크린(영사막)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극장의 스크린이 투명하다면, 우리가 영화를 볼 수 있겠는가?
<할로우맨>에서는 투명인간이 빛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온다. 눈꺼풀도 투명하기 때문에 눈을 감은 상태로 있을 수가 없다는 얘기인데, 이처럼 빛 자체에 대해서 과민해지는 것은 말이 될지 몰라도 투명인간이 가시광선으로 사물을 식별한다는 것은 넌센스나 다름없다.
끼니를 잇는 것도 꽤나 비위가 상하는 일이 된다. 음식물은 신체의 일부가 아니므로 소화 과정을 거쳐 완전히 배설되기 전까지는 항상 몸 안에 남아 있다. 만약 투명한 모습으로 외출을 하고 싶다면 먼저 위장이 깨끗이 비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방광에서는 수시로 소변이 생성되므로 이것도 그때그때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한다. 이렇듯 소화되기 전후의 음식물은 물론이고 배설하지 않은 대소변들이 허공에 둥둥 떠있는 장면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온 몸을 옷으로 단단히 감싸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논리적 해결책이 없지는 않다. <할로우맨>에서는 일종의 특수 혈청 같은 것을 주입해서 투명인간이 되는데, 마찬가지로 음식물도 소화액과 섞이면서 그 안에 혼합되어 있는 특수 혈청에 의해 투명해진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특수 혈청을 주입한 투명 음식물을 먹을 수도 있겠고. 어쨌든 <할로우맨>에는 인간 실험 이전에 수많은 투명 동물들도 등장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완벽하게 몸을 숨기는 것은 쉽지 않다. 몸은 보이지 않지만 체온을 숨길 수는 없기 때문. 은행의 비밀금고에 몰래 들어가더라도 신체에서 발산되는 열선은 여지없이 적외선 감지기에 걸린다. <할로우맨>에서도 적외선 안경으로 투명인간을 포착하는 장면이 나오듯이. 또 완벽하게 투명해지려면 몸에 달라붙는 미세한 먼지들을 계속 털어내야 한다. 그러지않으면 허공에 희미하게나마 유령처럼 사람의 윤곽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이 또한 <할로우맨>에서 소화기나 물 등을 허공에 뿌려 투명인간을 찾아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투명인간의 삶은 고달프고 까다롭기 그지 없다.
투명인간이라는 개념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영국작가 H.G.웰스가 1897년에 <투명인간>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였다. 이 소설은 1933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현재까지 투명인간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영화는 서양에서만 30여편이 넘게 발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기충 감독이 연출하고 이영하가 주연한 <투명인간>이 1987년에 발표된 적이 있다. (웰즈의 <투명인간>과는 전혀 상관없는 스토리지만.)
<할로우맨>은 작품 자체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주기가 힘들다. '광기에 찬 과학자', 즉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라는 SF의 전통적인 제재를 채택했지만 주인공의 성격이 너무 단순하게 일면적으로만 묘사되어서, 오히려 설득력이 반감되는 느낌이다. 이 영화가 과학자의 윤리 의식에 대해 뭔가 말하려 했다면 캐릭터의 과잉 묘사로 오히려 실패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투명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온 몸의 생체조직이 마치 해부도처럼 단계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등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차라리 영화가 아니라 일종의 가상적인 과학 다큐멘터리로 본다면 좋을 듯 싶다. 그밖에는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해프닝이나 현상 등이 묘사되어 있지만 그다지 새롭거나 흥미로운 장면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같은 투명인간 이야기인 존 카펜터 감독의 1992년작 <투명인간의 사랑(Memoirs Of An Invisible Man)>이 더 인상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박상준 (SF/과학해설가)
- 사이언스올 제공
- 저작권자 2004-11-22 ⓒ ScienceTimes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