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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성하운 객원기자
2016-03-24

한국 과학기술을 일군 개척자, 최형섭 과학기술 50년 (1) KIST 초대 소장, 7년 7개월 '최장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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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획기적인 전환기가 있다. 한국 과학기술 역사에 있어서 1960년대가 바로 그러한 시기다. 올해 2월로 설립 반세기를 맞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종합 과학기술 연구소였다. KIST 설립 3개월 뒤인 1966년 5월 19일 ‘발명의 날’에 ‘제1회 전국과학기술자대회’가 열렸고, 그해 9월에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창립됐다. 다음해인 1967년 정부는 과학기술정책에 관한 최초의 종합 법률인 '과학기술진흥법'을 제정하고, 4월 21일 과학기술 행정을 전담하는 행정부서로 과학기술처를 발족시켰다. 1968년부터는 과기처 설립일을 기념해 매년 4월 21일 ‘과학의 날’로 정해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다. 해방 이후 자주독립국가의 과학기술체제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과학기술자들의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한 신문은 1967년을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붐’이 일어난 시기라고 표현했다. KIST 설립과 과학기술처 발족은 우리나라가 현대적 과학기술 연구와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한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70년대에 들어 분야별 정부출연연구소의 설립이 이어지고,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한 한국과학원(현 KAIST)이 홍릉에서 개교했으며 대덕연구단지가 건설되어 '한강의 기적'을 뒷받침한 과학기술 연구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사이언스타임즈>는 과학기술 연구 및 행정 체제 수립 50주년을 맞아 1960,70년대 한국 과학기술의 태동기 주요 사안을 항목별로 짚어본다.

‘과학 행정의 달인’, ‘과학과 정부의 매개자’, ‘과학기술의 전도사’.

그를 설명하기 위해 붙는 호칭은 연구자마다 이렇게 차이가 있다.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뛰어난 금속공학자이자 대한민국 과학기술 연구 체제의 기본 틀을 세운 탁월한 과학 행정가였다. 바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초대 소장을 거쳐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1970년대 7년 7개월간 '최장수 장관'을 지내며 과학기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최형섭(1920.11.2 ~ 2004.5.29.)의 이야기다.

그는 KIST를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과학기술연구소로 키웠고, 과거의 연구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새로운 연구소 모델을 제시하고 정착시켰다. 그는 산업발전과 직결되는 과학기술 두뇌 집단을 양성하고 안정적인 연구 기반을 확립시켰다.

KIST 초대 연구소장에 취임하기 전에 그는 이미 회사 경영, 대학교수, 고급공무원, 연구원 등 다양한 사회 경력을 쌓았다. KIST소장을 맡기 전에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이미 두 차례나 맡아 본 경험이 있고, 과학기술분야 민간연구소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6년 2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KIST 초대 소장 임명장을 받는 최형섭.  ⓒ KIST
1966년 2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KIST 초대 소장 임명장을 받는 최형섭. ⓒ KIST

그는 4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추진하는 연구에 참여하기 위해 원장직을 물러나 캐나다로 가서 초빙연구원으로 1년여를 지내다 귀국했다. 그 때 캐나다의 NRC 연구체제가 정부 지원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자율 연구를 시행하는 시스템이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한화학회지에 이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원자력연구소 소장을 지내다 KIST 초대 소장으로

그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 따르면 이 글을 대통령 박정희가 읽고 1964년 말 비서관을 통해 연락이 왔다.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들 앞에서 국내  과학기술 발전과 과학교육 개편 방안, 연구소 체제와 운영 방향에 대해 평소 지론을 설명했다.

이를 계기로 최형섭은 1965년 한미 정상 간에 합의한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기술 연구소의 설립 과정에 참여하면서 미국 측 관계자들과 협동 작업으로 연구소의 기본 골격을 갖추고 운영까지 맡는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가 바로 1년 뒤에 기존 국내 연구소와는 전혀 다른 운영 방식의 KIST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미국 측에서는 세계 정상급 벨연구소를 모델로 삼을 것을 권유했지만 결국 최형섭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기업체의 수탁연구를 시행하는 바텔기념연구소를 모델로 삼을 것으로 합의됐다.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산업 현장의 요구에 맞춰 생산에 바로 적용해 쓸 수 있는 과학기술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1969년 10월 30일 KIST를 찾은 험프리 당시 미국 부통령에게 최형섭 초대 소장이 연구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KIST
1969년 10월 30일 KIST를 찾은 험프리 당시 미국 부통령에게 최형섭 초대 소장이 연구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KIST

과기처 2대 장관으로 7년7개월 최장수 장관 기록

5년간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KIST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최형섭은 1971년 6월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에 취임한다. 그는 7년7개월 재임이라는 역대 최장수 장관의 기록을 세우면서 일관된 원칙과 방향을 갖고 과학기술정책을 펴나갔고, 국가 과학기술 체계를 만들어갔다. 과기처 장관으로서 그는 70년대 과학기술개발의 방향을 △과학기술 기반 구축 및 강화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과학기술의 풍토 조성이란 3가지 큰 축으로 내세웠다.

그는 장관 시절 KIST에 준하는 특정연구기관육성법 등 10여개의 새로운 법률 제정을 지휘해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70년대 후반의 정부출연연구소 설립을 지원해 연구개발체제를 강화했다. 장관 재임 시절 최형섭의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사업은 대덕연구단지의 건설이었다.

그는 또 장관 초기부터 기초과학의 육성에 대해서도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73년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대학의 기초과학을 지원할 한국과학재단의 설립에 대한 구상을 처음 보고했다. 대학을 관장하는 문교부가 나서지 않자 과학재단은 결국 1977년 과기처 주관으로 설립하게 됐고, 최형섭이 초대 이사장을 맡아 장관 퇴임 후인 1980년까지 재단의 운영 기반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일관된 철학을 갖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과학기술 행정을 펼쳐 당시 과기처 공무원들로부터 ‘가장 이상적인 장관’으로 꼽히기도 했다. 학자들로부터는 ‘원칙에 입각한 저돌적 리더십’(염재호)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최형섭은 스스로를 과학계와 정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과학 관료’라고 표현했다.

그가 이같이 중요한 업적을 쌓은 데에는 젊어서부터 과학기술계의 리더로 역할을 해오면서 쌓은 인맥과 함께 연구자로서의 원칙주의자적인 성향이 강해 소신껏 일했다는 면도 있고, 18년간 권좌를 지켰던 대통령 박정희의 신뢰와 그에 따른 막강한 후원도 크게 작용했다.

“최형섭 소장은 실패를 야단 치지 않았던 분”

최형섭 초대 소장 당시 해외 두뇌로 영입되어 KIST 경제분석실장을 지낸 윤여경 피앤아이 전 회장은 “최 소장님은 실패를 야단치지 않았던 분”이라며 “‘후배들이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실패한 것은 기록을 철저히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윤 전 회장은 “남 안하는 연구를 하는 게 과학기술자들의 꿈인데 당시 KIST 연구원들은 산업계가 요구하는 연구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자기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게 최형섭 소장의 운영 철학이었다”며 “이를 통해 현재의 KIST는 결국 최형섭 초대 소장이 꿈꾸던 수준까지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형섭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을 위한 과학기술발전 모형도 세웠다. 자신의 한국 과학기술 연구과 개발에 관한 구상과 실천 경험을 정리하고 과거 발표했던 논문들을 함께 묶어 ‘개발도상국의 기술 개발 전략 1~3부’란 이름으로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영어와 일어로 번역됐을 뿐 아니라 2권은 중국어 이란어로도 번역될 만큼 관심을 끌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유엔산하기관과 국제기구의 요청으로 이집트, 태국, 파키스탄, 인도 중국 등 개발도상국을 순방하며 과학기술 발전 전략과 행정 정책을 전수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가 국제기구 회의를 포함해 해외 연찬회나 학술모임 등에 참석한 회수는 1962년부터 1994년까지 110여 차례나 기록되어 있다.

그는 과학기술 연구자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전공한 화학야금학 분야에서의 연구 성과는 금속 야금 분야 미국 교과서의 한 장을 차지할 정도로 지금까지도 탁월한 연구 결과로 인정받고 있다.

어릴 적부터 꿈은 “자동차를 내손으로 만들어 보는 것”

그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전근이 잦았던 아버지를 따라 대전으로 옮겨와 대전중학(현 대전고등학교)을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본에서 출판된 어린이 과학잡지를 구독했고,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집안 창고에 ‘이화학 실험실’을 만들고 과학 실험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내손으로 만들어 보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는 미국 자동차 회사인 포드사에 입사 원서를 내기도 했고, 귀국해서는 과거 기술고문을 지냈던 국산자동차(주)의 부사장으로 일했다. 이 국산자동차(주)는 그 뒤 새나라자동차 등을 거쳐 결국 대우자동차(주)로 바뀌었다. 이 시절 그는 나중에 대통령 박정희의 제2 경제 수석비서관으로 ‘방위산업의 대부’ ‘중화학공업의 대부’라는 별칭을 가졌던 오원철을 공장장으로 불러 자동차 제작 일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이러한 업적을 인정 받아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이 설치될 때 첫 번째 헌정자 1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2004년 타계한 그는 과학기술자로서는 화학자 이태규(1902~1992)에 이어 두 번째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대전국립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다.

“학문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부귀영화에 집착해선 안된다”, “시간에 초연한 생활연구인이 되어야 한다”,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최형섭 연표>

1920년           11월 2일 경남 진주 출생

1936년           대전중학(현 대전고등학교)  졸업

1944년           일본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채광야금과 졸업

1944~45년   조선광업주식회사에 전시동원령에 따른 연구원 배정

1945~46년   부친이 해방 후 운영하게 된 진주견직주식회사 전무

1946~47년   경성대 이공학부 광산야금학과 전임강사

1947~49년   해사(海士)대학 교수 - 기관과 열역학 강의

1949~50년   국산자동차(주) 기술 고문

1950~53년   6·25 전쟁 발발로 군 입대해 공군 항공수리창장 재직

1955년          미국 노트르담대학에서 공학석사 취득

1958년7월   미국 공학박사 취득(금속공학-화학야금 전공)

1958~59년   미국 내무성 자원개발부 연구원

1959~61년   국산자동차(주)(나중에 여러 차례 바뀌어 대우자동차로 변신) 부사장

1959년2월    원자력연구소 개소

1961년9월    (재)금속연료종합연구소 창립 (최형섭 발의)

1961~62년   상공부 광무국장 및 원자력연구소 1급 연구관 겸임

1962~63년   제4대 원자력연구소 소장

1963~64년   캐나다 앨버타대학과 앨도라도금속연구소 초빙연구원

1964~66년   제6대 원자력연구소 소장

1966~7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초대 소장

1969~77년   제1~5대 한국원자력학회 회장

1971~78년   제2대 과학기술처 장관(7년7개월 재임, 최장수 장관 기록)

1973년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 계획 수립, 이듬해 건설 시작

1977~80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1981년          태국에서 6개월간 과학기술 개발계획 수립 자문

1987년          (재)포스코산업과학기술연구소 고문 취임

1996~99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12대 회장

1996년~     충남대 석좌교수 역임

2004년      5월 29일 사망. 과학기술자로는 2번째로 국립묘지에 안장

성하운 객원기자
hawoonsung@gmail.com
저작권자 2016-03-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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