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배경 탓에 일본에서는 환경단체와 일부 정부 기관이 관람을 촉구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시사회에서 환경부 장관이 축사를 하기도 했다. 너무 과장된 영화 내용에 대한 과학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울 모 대학의 대기과학과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침 개봉일도 6월5일 ‘환경의 날’이었다. 그냥 해프닝으로 지나칠 수 있는 <투모로우>를 둘러싼 이런 에피소드들은 환경운동과 과학기술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좀더 진지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투모로우>는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영화가 아니라, 최근 언론에 더욱더 자주 오르내리는 각종 ‘환경 재앙 시나리오’들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지난 2월에 환경 재앙에 따라 가중될 국제 분쟁을 예측한 미국의 국방부 보고서가 언론에 크게 보도됐고, 영화 개봉 직전에는 북유럽의 과학자들이 <투모로우>에서 묘사한 것과 거의 유사한 시나리오를 포함한 연구 결과를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물론 이런 주장을 일부 환경단체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환경단체들의 이런 대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환경 파괴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데 시민들의 환경에 대한 의식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정부 대응 역시 굼뜨기 때문이다. 일종의 ‘막대 구부리기’의 성격을 띤 대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런 대응이 환경운동에 도움이 될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번에 화제가 된 기후변화만 하더라도 상이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나마 가장 정제된 과학계의 견해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의 과학자들이 매 5년마다 기후과학 분야의 연구 성과들을 검토해 이를 바탕으로 내놓는 보고서일 텐데, 이 역시 매번 논란이 되고 있다.
환경운동에 동조하는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가져올 잠재적 위험과 그 시기가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주로 기업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과학자들은 과대평가됐다고 비판한다.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이런 현실에서 환경단체들이 매번 가장 극단적인 견해를 자기 것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선 ‘양치기 소년’의 비참한 운명이 환경운동에게 닥쳐올 수 있다. 환경 재앙이 당장 초래할 것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 대중들에게 경고를 했는데, 나중에 그 경고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때 환경운동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 상실은 회복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런 환경에 대한 극단적인 위험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환경문제가 위치한 복잡한 정치․경제․사회적 맥락을 대중들이 간과하게 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기후변화 문제만 하더라도 그 안에는 과학기술의 불확실성, 에너지 전환, 산업구조 개편, 환경을 둘러싼 국제 정치 등 여러 가지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 “파국이 임박했다”는 주장은 토론과 대안 마련을 위한 고민들을 한 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든다. 최근 환경운동에 대해 ‘생태파시즘’이라고 매도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것도 이런 환경운동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환경운동이 가져야할 바람직한 관점은 무엇일까? 일단 논쟁의 초점을 과학기술에서 더 넓힐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한 쪽에서는 환경운동에 유리한 과학적 견해를 찾고, 다른 쪽에서는 기업에 유리한 과학적 견해를 찾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과학기술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대중들이 과학기술을 불신하는 계기가 된다.
기후변화가 어느 시점에 오는가, 그 파급력의 정도는 어떨까, 이런 질문에 대한 과학자들의 다양한 대답은 그 자체로 참고해야 할 사항일 뿐이다. 환경운동은 굳이 좀더 극단적인 기후학자의 견해를 찾아 그것에 의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 환경운동 편에 선 기후학자들에게 좀더 ‘센’ 연구 결과를 내놓으라고 불평할 필요도 없다.
대신 환경운동은 인류 공동의 미래를 위해서, 지탱가능한 사회를 위해서 어떤 실천이 필요한지를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제기할 필요가 있다. 기후변화로 파국이 임박했으니 온실 가스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현재의 화석 연료로 지탱되는 문명이 결코 지탱가능할 수 없음을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실천이 더 필요하다.
이런 실천은 단기간에 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더 큰 영향력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설득 과정에서 과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는 참고사항으로서 제시될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대중들은 과학기술을 사회에 대한 독립변수가 아닌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이런 경향이 환경운동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부 과학자들이나 관계 기관이 더 많은 연구비를 따내기 위해서, 종종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을 부추기는 ‘과장된’ 연구 결과를 내놓는 일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언론 역시 이런 문제에 자유롭지 않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대개 언론에 의해 유포되며, 언론에 보도될 때 그것은 더욱더 부풀려지기 십상이다. 이것은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뉴욕타임스> 같은 수준 높은 과학 기사로 유명한 외국 언론도 마찬가지다. <뉴욕타임스>의 과학 담당 기자도 기사를 균형 감각 있게 써 가면, 더 강한 표현을 넣을 것을 데스크로부터 강요받는 게 일상적인 일이라고 한다.
사실 나부터 북유럽 과학자들이 내놓은 연구 결과를 <투모로우> 개봉과 연결해 제일 먼저 기사를 쓴 당사자이니 이런 문제를 제기할 자격이 애초에 없는 셈이다. 물론 ‘막대 구부리기’가 필요하다는 심정에서 썼다고 변명하면 용서가 될까?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환경운동, 언론, 과학자 역시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강양구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기자
- 저작권자 2004-08-1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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