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공부를 하러 갔을 때, 지도교수가 저에게 처음 준 과제가 토끼 뒷다리였어요. 냉장고를 열어보니 토끼 뒷다리가 한 보따리 있더라고요. 거기서 프로테아좀 단백질을 뽑아내는 게 저의 첫 임무였던 거죠. 약 두 세 달을 토끼 뒷다리만 붙들고 살았죠. 이번 연구결과가 나오고 나니 당시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웃음)”
프로테아좀 복합체는 우리 몸의 필요 없는 단백질을 적절한 시기에 없애주는 생체조절 핵심기능 물질이다. 단백질로 이뤄진 우리 인체는 양질의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쓸모없는 단백질을 폐기하는 역할도 매우 중요해 프로테아좀 복합체 연구는 전 세계 많은 과학자의 큰 관심대상이다.
김호민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교수는 세계에 몇 안 되는 단백질 분해과정을 규명한 과학자다. 기존에는 단백질 결정학을 사용해 이를 규명했으나, 김호민 교수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바이오 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 이를 규명했다. 결정학과 현미경 사용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연구자 중의 하나다.
바이오 투과전자현미경 시대를 열다
우리 몸에는 많은 단백질이 존재한다. 이 중 어떤 단백질은 생성돼야 하며, 어떤 단백질은 분해돼야 한다. 공장에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폐기처리도 해야 하듯이 우리 인체도 이와 똑같은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단백질을 생성하는 필요한 핵심요소가 ‘라이브좀’이며, 소멸할 때 필요한 것이 ‘프로테아좀’이다.
“프로테아좀 복합체는 단백질이 30개 이상 모인 큰 단백질 복합체입니다. 단백질은 하나하나의 기능이 있어 인체 내에서 작용을 하기도 하지만, 어떤 기능을 내기 위해 단백질이 10개 혹은 20개가 모여 한 덩어리로 작용하기도 하죠. 생체 내 한 개씩 작용하는 단백질도 많은데, 실제로 살펴보면 두 개 이상 혹은 더 모여서 복합체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프로테아좀 연구는 20~30년 전부터 전 세계에서 많이 진행되어 왔다. 구조와 원리를 밝히는 것이 추후 퇴행성 뇌질환 혹은 암질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변의 사물을 모양을 통해 성격을 추측하듯, 단백질도 모양과 기능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단백질의 생김새를 관찰함으로써 각각의 기능을 이해할 수 있죠. 이러한 단백질을 연구하기 위해 기존에는 ‘단백질결정학’ 방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는 고농도의 단백질을 결정상태로 만들고 여기에 X-ray를 쏘여 회절패턴을 분석하는 것이죠. 이렇게 3차원 구조를 결정하는 단백질결정학 방법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많이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분자수준까지 자세히 볼 수 있어도 실험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죠. 또한 결정을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고요.”
단백질결정학 방법은 매우 크고 복잡한 단백질복합체 구조를 분석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큰 복합체 결정은 만드는 것이 어려워 많은 단점들이 지적되곤 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바이오 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한 단백질복합체 구조분석법이 새롭게 시도되고 있다. 전자현미경 안에 단백질 샘플을 넣고, 사진을 찍은 후 여러 각도에서 찍힌 단백질 샘플 사진을 분석하는 것이다.
“단백질의 후면, 전면, 측면을 사진 찍은 다음 컴퓨터 계산 방법을 통해 3차원으로 이미징을 합니다. 이 기술을 'Single Particle EM' 이라고 부르죠. 이 기술은 단백질결정학보다 적은 단백질 샘플로 분석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요. 그리고 크기가 큰 복합체 분석에도 매우 용이하지요.”
사실 국내에는 단백질결정학 방법을 잘 이용하는 전문가들은 매우 많다. 그러나 바이오 투과전자현미경 방법을 구현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구현하는 경우도 흔치 않다. 하지만 김호민 교수는 이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과학자인 셈이다.
“바이오 투과전자현미경 기술의 핵심은 사진을 잘 찍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어렵지만 찍은 후 3차원으로 이미징 프로세싱 연구를 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렵죠. 사실 현미경으로 사진 찍는 게 뭐가 어렵냐고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아마 전문 사진작가들의 사진이 일반 사람들의 사진과 다른 이유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웃음)”
생체조절의 핵심원리 밝혀
김호민 교수는 박소현 미국 콜로라도 부교수와 함께 바이오 투과전자현미경을 이용해 프로테아좀 복합체 구조를 고해상도로 규명했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학술지 '네이처' 5월 5일자 온라인 판에 게재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프로테아좀 복합체 연구는 왜 중요한 것일까. 김호민 교수는 질병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과 연관이 깊다고 말했다. “우리 몸에서 단백질은 적당할 때 만들어지고 적당할 때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병이 되는 것이죠. 암과 같은 질환도 없어져야 하는 단백질이 빨리 소멸되지 않아 발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 외에도 치매나 알츠하이머병 역시 뇌에 어떤 침착물이 생김에 따라 발생한다고 볼 수 있죠.”
프로테아좀이 침착된 물질을 빠르게 분해를 해줘야 하는데, 그 시기를 놓치면 결국 퇴행성 뇌질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면역체계에서도 프로테아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외부로부터 세균이나 감염물질이 들어올 때 외부 감염물질을 잘게 쪼갠 다음 항체가 만들어진다. 이 때 감염물질을 쪼개는 것 역시 프로테아좀의 역할이다. 즉, 항체가 만들어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우리 몸의 많은 부분은 프로테아좀이 중추역할을 하고 있어요. 때문에 이것이 망가지면 모든 병에 다 걸릴 수 있죠. 프로테아좀의 고장이 어떤 병을 일으키느냐고 물으면 정확히 대답을 하기 힘들어요. 그만큼 많은 질환을 발생시키기 때문이죠.”
이번 결과는 생체 내 단백질을 분해하는 프로테아좀의 메커니즘을 규명한 만큼, 우리 몸의 단백질들이 어떤 형태로 분해되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분해 현상 뿐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응용연구라기보다 기초연구에 속하는 분야입니다. 프로테아좀이 어떻게 생겨나고 조립되는지, 그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지식이 축적되다보면 신약개발로 더 원활히 이어질 수 있겠죠.
현재도 이를 기본 원리로 해 사용되는 항암제가 존재하고 있어요. 하지만 부작용이 심하죠. 프로테아좀을 좀 더 세밀하게 연구한다면 미세한 조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추후에는 부작용이 없는 항암제를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김호민 교수는 앞으로 자신의 기술 장점을 살려 지금까지 규명하기 어려웠던 질병의 단백질 구조를 밝힐 계획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후학양성에도 더욱 초점을 맞춰 학생들이 새로운 분야에 시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 황정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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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3-05-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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