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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응용과학
김병희 객원기자
2020-09-23

크롬강, 천 년 전 페르시아에서 처음 제조 “섬세하고 정교하나 부서지기 쉬워 시장성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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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강도 높은 공구용 강(鋼)과 유사한 크롬강(chromium steel)은 지금까지 전문가들이 생각해 왔던 것과 달리 거의 1000년 전에 페르시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연구팀은 중세 페르시아의 여러 문헌 사본을 검토한 뒤, 이란 남부의 차학(Chahak)에 있는 고고학 유적지에서 이를 확인해 ‘고고학 저널(the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23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이번 발견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동안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이 오랫동안 크롬강은 20세기 기술 혁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사진 왼쪽은 철을 만드는 도가니 벽과 찌꺼기 사이의 접촉면을 주사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모습으로 찌꺼기에 둥근 철 구슬이 나타나 있다. 사진 오른쪽은 도가니 찌꺼기에 큰 강철이 묻혀 있는 모습으로, 철은 흰색, 일부 잔류 크롬은 옅은 회색으로 보인다. © Rahil Alipour, UCL

문헌에 등장한 철강 산지를 찾아

논문 제1저자인 UCL 고고학과 라힐 알리푸르(Rahil Alipour) 박사는 “이번 연구는 철강을 생산할 때 의도적으로 크롬 광물을 첨가했다는 최초의 증거를 제시하며, 우리는 이를 페르시안 현상(Persian phenomenon)의 하나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연구는 크롬강 생산 연대가 11세기로 올라가는 최초의 증거를 제시할 뿐 아니라, 박물관이나 고고학 수집품 가운데 도가니(crucible)를 이용해 만든 강철 인공물들이 차학에서 기원하거나 차학 전통에 따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화학적 추적자를 제공해 준다”고 덧붙였다.

차학은 12세기부터 19세기 사이의 수많은 역사 문헌에 유명한 철강 산지로 묘사돼 있고, 이란 내에서 도가니 제강 증거가 있는 유일한 고고학 유적지다.

차학은 이렇게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장소로 등록은 돼 있었으나 이란의 수많은 마을에 똑같이 차학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어 그동안 실제로 어떤 곳이 도가니 제강을 한 곳인지 찾기가 어려웠다.

역사 문헌에 유명한 철 산지로 묘사돼 있는 이란 차학의 지층. 현지 어린이가 조사팀을 내려다보고 있다. © Rahil Alipour, UCL

주사전자현미경으로 크로마이트 잔해 식별

연구팀은 먼저 문헌에서 연구의 단초를 찾았다. 11세기경 페르시아의 박사 아부-라이한 비루니(Abu-Rayhan Biruni)가 쓴 ‘al-Jamahir fi Marifah al-Jawahir(보석을 알기 위한 개요서)’는 도가니 제강법을 적어 놓은 유일한 문헌이어서 연구자들에게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제조법에는 크롬 도가니 강철 제조를 위해 크롬 광물이라고 식별한 신비한 성분을 기록해 놓았다.

연구팀은 광석에서 금속을 분리하고 남은 찌꺼기인 도가니 슬랙과 대장간 슬랙에서 회수한 수많은 목탄 조각들을 대상으로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을 실시해, 철강 제조가 11~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결정적으로 주사전자현미경 분석을 통해 비루니의 문헌에서 제강 공정에 필수적인 첨가제로 기록된 광석광물인 크로마이트의 잔해를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차학에서 발굴한 깨어진 도가니 확. 안쪽에 철 덩어리가 들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Rahil Alipour, UCL

연구팀은 또한 도가니 슬랙에 보존된 강철 입자에서 무게의 1~2% 정도를 차지하는 크롬을 검출해 크롬 광물이 크롬강 합금 제조에 쓰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공정은 거의 1000년 뒤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들어와 다시 사용됐다.

페르시아의 고유한 저크롬강 제조법

논문 공저자인 UCL 고고학과 및 사이프러스 연구소 틸로 레런(Thilo Rehren) 교수는 “알리푸르 박사가 번역한 13세기 페르시아 문헌에서 차학 강철은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으로 유명했다고 나와 있으나, 크롬 합금으로 만든 칼은 또한 쉽게 부서질 수 있어 시장 가치를 잃었다”고 설명했다.

레런 교수는 “오늘날의 차학 유적지는 고고학적 관심이 쏠리기 전 작고 조용한 마을로, 주 산업은농업이었다”고 덧붙였다.

도가니 파편 안쪽에 붙어있는 도가니 찌꺼기. © Rahil Alipour, UCL

연구팀은 차학 제강법이 철에 1% 정도의 크롬만을 첨가하는 저크롬강 제조법으로서, 그보다 더 널리 알려진 우즈베키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제강법과는 다른, 고유한 페르시아 도가니 제강 전통을 나타낸다고 보고 있다.

논문 시니어 저자인 케임브리지대 마르코스 마티넌-토레스(Marcos Martinon-Torres) 교수는 “식별 과정이 매우 길고 복잡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먼저 기술 공정이나 재료를 기록하는데 사용된 언어나 용어가 더 이상 쓰이지 않거나 그 의미나 속성이 현대 과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글을 서술하는 일은 실제로 공정을 수행한 개인이 아닌 사회적 엘리트에게만 제한돼 텍스트에 오류나 누락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알리푸르 박사는 “이번 연구 결과를 박물관 전문가들과 공유해 고유한 크롬강 특성을 지닌 좀 더 이른 도가니 강철의 기원과 연대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김병희 객원기자
hanbit7@gmail.com
저작권자 2020-09-2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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