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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 단열재부터 생활용품에까지, ‘짚’ 흔해 빠진 짚을 황금처럼 사용한 선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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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첫발을 내디딘 '꿈꾸는 과학'은 과학의 대중적 글쓰기와 일러스트레이션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는 글쓰기 공동체입니다. 꿈꾸는 과학은 모두가 즐거운 과학을 이야기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꿈꾸는 과학은 다양한 과학책들을 읽고 토론함으로써 비판적 사고와 과학적 상상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또한 꾸준히 과학 글쓰기를 연습함으로써 자신만의 글쓰기 스타일을 구축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는 꿈꾸는 과학의 소망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하고 이러한 즐거움들이 모여 건전한 과학문화를 만들어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편집자 註]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게는 독특한 ‘색깔’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흰색’이다. 부패와 부정을 멀리하고 깨끗함을 추구했던 조상들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불리었다.


또한 고려청자가 뿜어내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비취색’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아름다움이 오죽했으면 고려의 최고 문장가 이규보는『동국이상국집』에서 시 한편으로 고려청자를 극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붉은색’도 한몫을 한다. 국민 모두가 붉은색의 ‘악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색깔’들이 우리의 정서를 모두 표현한다고 하기에는 뭔가 모자람이 있다. 중요한 무언가를 빠트려버린 답답함이랄까.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과 자랑거리가 아닌, 우리 삶의 진실된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색깔’이 있지 않을까? 물같이, 공기같이 흔하게 우리 곁에 있어 쉽게 느끼지 못했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것들. 우리가 사는 집, 먹는 음식, 어울리는 놀이, 오래된 믿음 그리고 고된 삶의 애환까지 아우를 수 있는 그런 ‘색깔’ 말이다.


기억을 더듬어 지금까지 박물관에서 보아왔던 유물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별로 신통치 못하다. 대신 눈을 돌려 우리 민족이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본다. 처마 밑에 걸린 메주, 농사의 시작과 수확, 나뭇짐이 얹어진 지게 그리고 하루의 피곤함을 달래주는 편안한 집. 왕족이나 양반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왔던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한 가지 ‘색깔’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황금처럼 반짝이고 화려하지 않지만, 무엇보다 수수하며 따뜻한 ‘또 다른 황금빛’, 바로 늦은 가을 들판을 물들이던 ‘짚풀’들이 만들어내는 ‘색깔’이다.


따지고 보면 짚만큼 우리 생활에 깊게 스며들었던 물건도 드물다. 입는 옷(衣), 먹을거리(食) 그리고 편안한 쉴 곳(住)까지 짚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단한 마당발이다. 심지어는 먹은 후 ‘싸는’ 은밀한 곳까지 짚은 은근슬쩍 발을 들여 놓는다. 처음에는 평범해 보이는 지푸라기가 어디에 그리 많이 쓰일까를 고민했지만, 막상 찾아보니 오히려 짚이 없는 곳을 찾기가 더 힘들다. 아마도 짚의 색깔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천 년을 우리와 함께 해온 짚


짚의 역사는 곡식재배와 함께하기 때문에 그 시작은 기원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신석기 후기부터 조, 피와 같은 곡식이 재배되었다. 또한 청동기 전기에는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조금 후에 기장, 수수, 콩, 팥 따위가 재배되었다. 특히 벼농사는 기원후 1세기 초에 이미 일반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곡식을 추수하고 남은 짚을 이용하는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문화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짚 문화인 것이다.


보통 짚이라고 하면 벼를 수확하고 남은 줄기를 가리키는 말로 알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다. 짚의 의미는 보다 폭넓어 곡식을 추수한 후 남은 줄기와 잎을 통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벼의 경우에는 ‘볏짚’, 보리의 경우에는 ‘보릿짚’, 밀의 경우에는 ‘밀짚’, 콩의 경우에는 ‘콩짚’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반드시 곡식에만 짚이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점이다. 곡식을 수확하고 남은 줄기와 잎이 보통 식물 줄기와는 다르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짚 문화를 가장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집이다. 짚과 집, 발음도 똑같아 구별하기 힘든 두 가지가 깊이 연관되어있다니 참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집인 초가집은 말 그대로 ‘볏짚으로 이은 집’이라는 뜻이다. 잘 마른 볏짚을 모아 엮어 집의 지붕으로 얹히기만 하면 멋진 초가집 한 채가 완성 된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초가집의 흙벽에도 볏짚이 들어간다. 초가집의 벽은 흙에 잘게 썰어진 볏짚을 넣고 잘 반죽하여 안팎으로 붙여 만든다. 이렇게 볏짚을 섞어주는 이유는 흙이 마른 후에 갈라지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방의 바닥에도 갈대, 왕골, 부들, 볏짚 같은 것으로 돗자리를 만들어 깔아 생활했다. 그러고 보니 집 한 채를 통째로 볏짚을 사용해 만든 셈이다.


볏짚을 사용해 집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볏짚이 가지는 특수한 구조에 있다. 볏짚과 보릿짚을 잘라 단면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눈에 띈다. 보릿짚은 짚 가운데에 구멍 하나만 크게 뚫려있는 빨대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볏짚은 크고 작은 구멍들이 여럿 모여 있는 다공성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른 짚들과는 다르게 볏짚이 푹신푹신한 느낌을 가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볏짚의 구조는 천연 단열재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지붕, 벽부터 바닥까지 짚으로 만들어진 초가집은 열이 쉽게 들어오지도 못하고 반대로 쉽게 나가지도 못하기 때문에 여름은 시원하게 겨울은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볏짚과는 반대로 딱딱하고 보온성도 없는 보릿짚은 쓸모가 없었을까? 보릿짚은 볏짚에 비해 딱딱해 잘 부러지고 꼬기도 힘들었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볏짚은 푸석푸석해 투박하여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보릿짚은 마치 코팅을 한 듯 매끄럽고 윤기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보릿짚을 이용해 만든 물건은 다른 것들에 비해 유달리 아름다웠다. 때문에 보릿짚은 아낙들에게 사랑받으며 아기자기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곡식을 추수하고 남은, 먹지 못하는 부분인 볏짚은 어울리지 않게 먹을거리와도 관계가 깊다. 고추장, 간장, 된장 등 한국 음식의 주요 양념에는 모두 장이 들어간다. 따라서 한국의 음식 맛은 ‘장맛’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장맛이 좋으려면 일단 장의 재료가 되는 메주가 좋아야 한다. 그런데 바로 볏짚에는 이런 맛있는 메주를 만들어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메주는 콩을 삶아 찧어 덩어리를 만든 후 발효시킨 것을 말한다. 모든 발효 식품이 그렇듯이 메주의 맛 역시 얼마나 잘 발효가 되는가에 달려 있다. 메주의 발효는 여러 가지 균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세균의 일종인 고초균(枯草菌, Bacillus subtilis)이다. 이 세균은 단백질과 전분을 분해하는 강력한 효소를 만들며 이것이 한국 특유의 장맛을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세균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고초[枯草]:시들어 마른 풀) 볏짚에 많이 살고 있다. 따라서 메주를 볏짚으로 묶어 매달아 놓으면 볏짚의 고초균이 메주로 이사(?)를 와서 메주를 맛있게 발효시켜 주는 것이다.


짚 덕분에 득을 보았던 것은 가축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농경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던 소는 짚의 덕을 단단히 보는 동물이었다. 소는 고기로 단백질 공급원의 역할도 했지만 사람의 힘으로 하기 힘든 일을 해결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이 컸다. 따라서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이듬해 농사를 위해서는 겨우내 소를 소중히 길러야만 했다. 그러나 봄에서 가을까지는 산과 들에 소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신선한 풀들이 항상 자라고 있었지만, 겨울에는 소에게 먹일 풀이 없었다. 그래서 풀 대신 소의 먹이로 사용했던 것이 바로 볏짚이다. 볏짚을 잘 잘라 콩깍지 같은 것들과 함께 쇠죽을 끓여서 한 겨울 내내 소중한 소의 먹이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에게는 짚신까지 따로 만들어 신겨주곤 하였다. 요즘처럼 길도 좋지 않고 자동차나 경운기도 없어 굳은 일은 모두 소가 도맡아 했을 것이다. 또한 무거운 것을 지고 먼 길을 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소의 다리는 항상 무리가 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소에게 신기는 쇠신을 따로 만들어 소의 다리를 보호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현대인들에게 짚이 남기는 생태학적인 교훈은 남다르다.


짚은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 크든 작든, 새것이든 헌것이든 두엄더미에 던져 놓아 썩힌 다음 비료로 만들어 밭에 뿌려주면 쉽게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자연으로부터 얻어 유용하게 사용하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보내 땅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짚이다. 현대에 사용되는 물건은 일회용이든 아니든 항상 쓰레기를 남긴다. 이것들은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지만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수백 년까지 변두리를 맴돌며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잠시의 편리함을 위해 자연과 대치하지 않고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자연과 공존하여 살아가는 법이 우리가 짚에서 배울 수 있는 올바른 생태학적 삶의 방식이다.


짚 문화, 인간을 위한 과학


사실 짚은 정말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 어디서나 흔하게 널려 있는 풀줄기일 뿐이다. 튼튼하지도 않고 불을 붙이면 쉽게 재가 되어 사라진다. 또한 조금 관리를 잘못하여 비라도 맞힌다면 썩어버려 두엄더미로 버려지는 신세가 되어 버리는 약해 빠진 물건에 불과하다. 초가집이 아무리 좋다하여도 기와집이 더 좋기 마련이고, 짚신을 아무리 예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죽신만 하지는 못하다.


허나 옛 사람들이 분명 좋은 기와집과 가죽신을 제쳐두고, 그 보잘것없는 짚으로부터 최고의 활용성과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었다. 열심히 노력해도 허망하게 사라지는 짚. 과연 옛 사람들이 그토록 지혜를 짜내 짚 문화를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기와집과 가죽신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양반만을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굳이 현재와 비교해 봐도 이런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최신의 과학과 최고의 기술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것인가? 사회가 자본주의화 되면서 과학 역시 자본주의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한 과학’이 아닌 보다 많은 이윤을 만들어내는 ‘소수를 위한 과학’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흔해빠진 짚을 가지고 지혜를 발휘하였다.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최고’보다는, 보잘것없어도 보다 많은 사람이 활용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한 셈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최고’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편리하고 행복하게 살아 올 수 있었다. 몇몇의 넘치는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돌을 황금으로 바꾸려 했던 것이 ‘과거의 연금술’이라면, 모든 사람을 위해 돌을 황금처럼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현대의 과학’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흔해 빠진 짚을 황금처럼 귀하게 사용할 줄 알았던 선조들, 이런 선조들의 솜씨야말로 진정 ‘인간을 위한 과학’이 아닐까?


이제는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색깔에 황금빛 ‘짚풀색’을 포함시켜도 될 듯하다. 그리고 그 색깔은 우리의 소박했던 삶을 말해주는 색깔임과 동시에, 무엇보다 인간적인 과학을 뽐냈던 선조들의 지혜가 발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 참고자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짚풀문화 - 현암사

풀코스 짚문화여행 - 현암사

짚문화 - 대원사

짚풀생활사박물관(www.zip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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