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에게 ‘백의천사’라는 호칭을 선물한 인물이다. 근대 간호를 창시했고 적십자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만일 나이팅게일이 마냥 남을 위해 봉사만 한 인물이었다면 이처럼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작은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았던 호모 컨버전스였다. 올해로 사후 100주년을 맞이하는 나이팅게일을 소개한다.
야전병원 체계 바꾼 개혁적 행정가
나이팅게일을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 다음으로 유명한 여성인사로 만들어 준 것은 크림전쟁이었다.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영국·프랑스·프로이센·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반도·흑해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자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들을 데리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나이팅게일은 이미 간호 분야의 전문가였다.
나이팅게일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해 가족과 함께 유럽, 이집트를 돌아다니며 의료 시설을 견학했었고 영국에서도 정규 간호교육을 받아 런던에서 숙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이 찾아간 스쿠타리 야전병원은 체계가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환자들은 피 묻은 군복을 입은 채로 누워 있고, 이와 벼룩이 들끓어 세탁조차 어려웠다. 부상병 숫자도 4천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사망률 또한 매우 높았다. 이제껏 배워온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었던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 운영체계를 근본부터 뜯어 고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때그때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는 문서화 시스템을 도입해 체계화시켰다. 이후 병사들의 위생 관리도 꼼꼼히 체크해 나갔다.
지저분했던 부엌과 세탁실도 새로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문자를 모르는 병사를 가르치기 위해 영어수업과 몇 가지 교양 강좌를 마련했다. 독서실과 여가오락실을 개설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병사들의 월급을 고향으로 송금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는 파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우편제도도 마련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 줬다. 그 결과 병사들은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되면서 스쿠타리 야전병원의 사망률이 3개월 만에 43%에서 2%로 뚝 떨어지게 됐다. 한마디로 행정 개혁이 바꾼 긍정적 결과물이었다.
정보를 디자인한 통계학자
나이팅게일은 크림반도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료조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통계적 비교 분석이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또한 숫자가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도 간파하고 있었다. 이후 나이팅게일은 800쪽이 넘는 통계 보고서인 ‘영국 군대의 보건 상태, 효율성, 병원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제 요소들에 대한 소고, 지난 전쟁에서의 경험에 입각하여’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그냥 숫자를 나열한 것만이 아니라 쐐기 모양의 통계 도표들을 삽입해 영국 군대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사망률을 표시하는 이 쐐기 모양 도형은 각각의 다른 색의 면적 세 개가 원의 중심으로부터 겹쳐져 있다. 우선 월별 사망률은 가장 바깥쪽에, 중간은 부상으로 인한 사망을, 기타 이유로 인한 사망은 가장 안쪽에 나타냈다. 이 그림을 통해서 나이팅게일은 당시 영국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부상으로 인한 사망보다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많다는 사실을 알리게 됐다. 정치인들에게도 공중보건에 관한 법률을 마련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법률이 제정되자 영국 군 상태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막사의 구조가 달라지고 난방, 통풍, 급수, 부엌, 하수 처리 시설이 나아졌다. 군의관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고 의학 통계를 수집하는 절차도 재정비됐다. 결론적으로 나이팅게일의 그림은 단순히 비교하는 역할을 넘어서 정보를 디자인한 도표였던 셈이다.
나이팅게일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을 위해 병원끼리 비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비교 자료로 쓸 통계를 뒤져보았지만 영국 병원들이 사용하는 기록 보관 양식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당시에 병원에 기록을 정리하는데 통일된 지침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나이팅게일은 이에 쓸모 있는 자료를 구축할 필요를 느끼게 됐고 통일된 병원용 기록 양식을 고안해냈다. 이 제안은 통계학자들의 찬성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 최초로 런던통계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되는 계기가 됐다.
간호학을 탄생시킨 교육자 겸 탁월한 저술가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의 교육을 체계화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당시 19세기 만해도 간호사의 사회적 위치는 하찮고 보잘 것 없었다.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의사를 밝혔을 때 집안의 반대가 아주 심했다. 간호사를 데리고 전쟁터로 왔을 때조차도 의사들의 무시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사회적 편견과 싸워 이겨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 종군 때의 공로로 받은 표창금과 국민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바탕으로 1860년에 런던의 성(聖)토마스 병원 내에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를 설립했다. 이곳은 간호학교의 모범이 됐다. 간호교육을 체계화시켰으며 간호사 교육을 간호사가 할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간호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켰다. 이 제도는 결국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 현대 간호교육의 기초가 됐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서 얻은 병 때문에 교단에 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교사진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간호교육의 시스템화 하는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간호와 위생에 관련한 저작활동도 왕성하게 해나갔다.
현재 그의 저작은 약 200권, 서한이 약 1만2천통이나 된다. 특히 1858년에는 병원 내부의 위생시설, 의사와 간호사의 질과 편리를 중시해야 된다는 새로운 제안을 담은 ‘병원에 관한 일들’을 출간했다. 1859년의 ‘간호에 관한 일들’에서는 위생적인 환경과 개인위생, 정신건강의 중요성, 환자의 증상 관찰에 대한 간호사의 민감성, 간호 원장의 감독책임과 윤리적인 지도에 대한 내용을 담아 책을 펴냈다. 현대 전문 간호사의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한 이 책은 출간 후 50여 년간 간호사들의 경전처럼 사용됐다.
야전병원 체계 바꾼 개혁적 행정가
나이팅게일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해 가족과 함께 유럽, 이집트를 돌아다니며 의료 시설을 견학했었고 영국에서도 정규 간호교육을 받아 런던에서 숙녀 병원의 간호부장으로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이 찾아간 스쿠타리 야전병원은 체계가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환자들은 피 묻은 군복을 입은 채로 누워 있고, 이와 벼룩이 들끓어 세탁조차 어려웠다. 부상병 숫자도 4천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사망률 또한 매우 높았다. 이제껏 배워온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를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었던 나이팅게일은 야전병원 운영체계를 근본부터 뜯어 고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때그때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는 문서화 시스템을 도입해 체계화시켰다. 이후 병사들의 위생 관리도 꼼꼼히 체크해 나갔다.
지저분했던 부엌과 세탁실도 새로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문자를 모르는 병사를 가르치기 위해 영어수업과 몇 가지 교양 강좌를 마련했다. 독서실과 여가오락실을 개설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병사들의 월급을 고향으로 송금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는 파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우편제도도 마련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 줬다. 그 결과 병사들은 심리적 안정을 얻게 되면서 스쿠타리 야전병원의 사망률이 3개월 만에 43%에서 2%로 뚝 떨어지게 됐다. 한마디로 행정 개혁이 바꾼 긍정적 결과물이었다.
정보를 디자인한 통계학자
나이팅게일은 크림반도에서 가장 효과적인 의료조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통계적 비교 분석이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또한 숫자가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도 간파하고 있었다. 이후 나이팅게일은 800쪽이 넘는 통계 보고서인 ‘영국 군대의 보건 상태, 효율성, 병원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제 요소들에 대한 소고, 지난 전쟁에서의 경험에 입각하여’를 만들었다.
법률이 제정되자 영국 군 상태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막사의 구조가 달라지고 난방, 통풍, 급수, 부엌, 하수 처리 시설이 나아졌다. 군의관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고 의학 통계를 수집하는 절차도 재정비됐다. 결론적으로 나이팅게일의 그림은 단순히 비교하는 역할을 넘어서 정보를 디자인한 도표였던 셈이다.
나이팅게일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좀 더 심도 있는 분석을 위해 병원끼리 비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비교 자료로 쓸 통계를 뒤져보았지만 영국 병원들이 사용하는 기록 보관 양식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당시에 병원에 기록을 정리하는데 통일된 지침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나이팅게일은 이에 쓸모 있는 자료를 구축할 필요를 느끼게 됐고 통일된 병원용 기록 양식을 고안해냈다. 이 제안은 통계학자들의 찬성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여성 최초로 런던통계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되는 계기가 됐다.
간호학을 탄생시킨 교육자 겸 탁월한 저술가
나이팅게일은 간호사의 교육을 체계화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당시 19세기 만해도 간호사의 사회적 위치는 하찮고 보잘 것 없었다. 때문에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의사를 밝혔을 때 집안의 반대가 아주 심했다. 간호사를 데리고 전쟁터로 왔을 때조차도 의사들의 무시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사회적 편견과 싸워 이겨냈다.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 종군 때의 공로로 받은 표창금과 국민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바탕으로 1860년에 런던의 성(聖)토마스 병원 내에 나이팅게일 간호사양성소를 설립했다. 이곳은 간호학교의 모범이 됐다. 간호교육을 체계화시켰으며 간호사 교육을 간호사가 할 수 있도록 했다. 더불어 간호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켰다. 이 제도는 결국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가 현대 간호교육의 기초가 됐다.
나이팅게일은 크림 전쟁에서 얻은 병 때문에 교단에 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교사진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면서 간호교육의 시스템화 하는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간호와 위생에 관련한 저작활동도 왕성하게 해나갔다.
현재 그의 저작은 약 200권, 서한이 약 1만2천통이나 된다. 특히 1858년에는 병원 내부의 위생시설, 의사와 간호사의 질과 편리를 중시해야 된다는 새로운 제안을 담은 ‘병원에 관한 일들’을 출간했다. 1859년의 ‘간호에 관한 일들’에서는 위생적인 환경과 개인위생, 정신건강의 중요성, 환자의 증상 관찰에 대한 간호사의 민감성, 간호 원장의 감독책임과 윤리적인 지도에 대한 내용을 담아 책을 펴냈다. 현대 전문 간호사의 역할의 중요성을 부각한 이 책은 출간 후 50여 년간 간호사들의 경전처럼 사용됐다.
- 김연희 객원기자
- iini0318@hanmail.net
- 저작권자 2010-10-2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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