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이 집안을 환하게 밝히기 이전, 우리 조상들은 마음을 아늑하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촛불을 벗 삼아 깜깜한 밤을 보냈다. 촛불 아래에서 행해지던 일상적인 일들은 전등의 출현과 함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전등은 우리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밤과 낮의 개념을 바뀌어 주었고, 생활의 영역 또한 넓혀 주었다. 이렇듯 감정에 호소하던 전통 등화구 대신에 현대의 전등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언제일까.
국립민속박물관은 광복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전력공사의 후원으로 10월 10일까지 <빛/Light - 燈, 전통과 근대 기획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전통시대의 등잔에서 근대의 전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서 쓰였던 등화구 관련 유물 250여 점과 전등관련 사진자료들이 한자리에 선보인다. 이번 전시회의 대다수 유물은 한국전력공사의 전신이었던 경성전기에서 수집해 1973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며, 전등 관련 사진은 1930년대의 한국전력공사 소장의 미공개 사진자료들이다.
조선에 어둠을 환히 밝히는 전등이 널리 퍼지면서 전통의 물결보다 새로운 근대화의 물결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조선에서 어둠을 밝히던 작은 등불 대신에 어둠을 대낮같이 장식한 전등은 언제 출현했을까. 그리고 전등은 어떻게 설치되었으며, 당시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전기는 개항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져 있었다. 1860년경에 수입된 <박물신편>의 <전기론>편은 전기의 성질인 음과 양에 대한 설명과 강수라 불리던 산과 물, 그리고 금속조각을 이용한 간단한 전기제법 등을 설명하고 있고, 서구에서 전기를 사용하는 사례인 전신, 무기, 동판제작, 전기 분해, 자석 및 나침반 등을 소개하면서 그 원리 및 간단한 이용방법들을 밝히고 있다. 또한 글의 끝에 번개와 작포라 불리는 물고기를 말하면서 자연에서 전기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예로 설명하기도 했다.
1876년 개항하면서 전기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더 많이 유입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예를 들어 박문국에서 발간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무엇보다도 1871년 청의 정관응이 쓴 <이언>은 전기에 대한 정보와 지식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관응은 글에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원칙 중 하나로 “무릇 세상에 전기만큼 매우 신기하고 빨라 이보다 빨리 없어지고 빨리 나타나는 것이 없다”고 전기에 대해서 이야기한 후 전보의 효용에 대해서 정확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양하고 광범위한 과학기술 관련기사를 다루었다. 기사내용 중에 전기에 대한 기사들은 주로 전기 현상에 대한 이론적 고찰, 전기 연구의 발전과정, 전기의 실생활 이용현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렇듯 개항 이전에 양극이나 음극에 대한 고찰, 손쉽게 전기를 제조할 수 있는 방법의 소개를 설명한 전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소개, 전기를 이용한 초보적이고 간단한 기기들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었다면, 개항 이후의 글들은 보다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또한 해외에 파견된 사신들은 전기가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후 그 경험들을 조선인에게 전했다. 1876년부터 1882년까지 세 차례 일본을 다녀온 수신사들은 일본에서 아크등 점등이나 전신을 체험하고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특히 일본에서 점등식을 가진 아크등은 현재 우리가 사용한 전등보다 더 밝은 것이었기 때문에 가스등조차 접하지 못했던 당시의 사람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기에 관한 지식이 쌓여가는 가운데 조선에 전기가 도입된 계기는 1883년 미국에 파견된 보빙사절단에 의해서 마련되었다. 보빙사절단은 미국에서 발전소와 전신국을 방문했고 전등이 켜지는 과정들을 목격했다. 그리고 서구 문명 및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도 외국 사신들과 접촉이나 그 자신이 수집한 서양관련 서적 등을 통해서 전기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밤늦도록 업무를 보던 고종의 업무스타일과 보빙사절단의 전기에 대한 실제적 경험에 대한 민영익의 의견은 전기 설치의 주요요인으로 작용했다.
개항 전후에 유입된 전기에 대한 정보와 경험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전기가 매우 편리하고, 다른 동력설비보다 적은 비용에 고효율을 올리며, 이용방법이 다양해 발전가능성이 무한한 서구의 최첨단 기술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알려졌고,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렇듯 보빙사절단의 경험과 당시 사람들의 전기에 대한 인식은 백열전구가 발명된 지 7년 후인 1887년에 궁궐을 전등으로 환하게 밝혀주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1890-190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는 서구의 첨단 문명인 전기를 도입할 정도의 사회적, 산업적 여건이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이러한 배경은 전기설비뿐만 아니라 발전 연료 등을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예로, 외국기술을 도입해 전기철도가 설치되었는데, 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은 전차 노선 확정, 전차 운행 개시, 그리고 전등 가설 등의 업무를 전개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는 투자한 만큼의 자본을 회수하는 경우보다 1898년 김두승, 이근배가 청원하여 설립한 한국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회사의 경영상태를 부실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한성전기회사는 황실에서 끓임 없는 지원을 받았으나, 경상적인 적자, 기술 설비 등으로 손실을 감당하기에 취약한 상태였다.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가 근대화와 개화를 향한 열망 때문에 서구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목적으로 전기회사를 설립했으나, 한성전기회사는 운영 도중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았고 그 소유권까지 상실했다. 이에 미국인 콜브란은 한성전기회사를 인수해 한국의 정치상황과 상관없이 미국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운영했다.
대한제국의 전기사업에 대한 논문에서, 김연희는 “한성전기회사는 외형적 근대화의 한 예라기보다 적극적으로 외국 첨단 기술을 도입해 식산흥업을 지원하고 황도의 근대화를 이루려는 황실과 대한제국 정부의 의지가 관철된 기업이었으나, 서구 첨단기술의 실용성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기술 이전이 저절로 이루어지리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미국인의 기술독점을 방지하지 못해 그 소유권이 이전된 기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의 여러 신문의 기사를 살펴보면, 한성전기회사가 설치한 한성의 전차, 전등을 대한제국의 수도에 설치된 것을 대환영했고, 전기설비들을 문명화의 상징으로 파악했으며, 그 편리성 또한 연일 게재되었다. 하지만 대중매체들은 전기산업이나 생활이 다른 산업과 어떻게 연관되어 운영되어야 하며, 전기사업의 자주적 운영을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나라 전기 수용의 일면을 보여주도록 크게 세 가지 주제로 전시되었다. 먼저, 제1부 ‘생활, 빛을 찾아서’는 등화구로 생활상을 느껴볼 수 있도록 애니메이션 동영상, 등화구 그래픽 모듈 등이 설치했다. 제2부 ‘전통, 빛을 담고서’는 등화구의 기능, 종류, 형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무신년진찬의궤, 초, 촛대, 등잔, 등잔대, 좌등, 제등, 초롱 등 170여점을 전시했다. 마지막으로 제3부 ‘근대, 빛을 모아서’는 소재변화에 따른 등화구의 변천사를 알아볼 수 있도록 가스등, 석유등, 전등 등 80여점을 전시했다.
전기가 도입되면서 세상은 더 밝아지고 편리해지면서 문화도 점점 바뀌게 되었다. 전시장에 설치된 다양한 새로운 조명과 사진 등을 통해서 우리나라 전등의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인의 생활의 변화, 문화의 변화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제 목 : 빛/Light - 燈, 전통과 근대
일 시 : 2005년8월 3일-2005년 10월 10일
장 소 :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
사이트 : http://www.nfm.go.kr/
문의처 : 02-3704-3156
- 공채영 객원기자
- 저작권자 2005-09-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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