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함께 한 물의 신비 (8)

[과학기술 넘나들기] (238) 타임캡슐과 같은 물

지구 상에 널리 존재하는 풍부한 물 중에는 지구의 오랜 역사 및 생명 탄생과 진화의 과정 등을 밝혀줄 단서들을 제공하는 특별한 물들도 있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오랫동안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왔기에, 과거의 지구 환경을 담고 있거나 고립된 곳에서 진화해온 생명체 등을 포함하는 대단히 귀중한 물이다.

그런 특별한 물이 있는 독특한 장소 중의 하나로서 카리브 해의 벨리즈, 바하마 제도 등에 분포된 싱크홀 즉 블루홀(Blue hole)이 있다. 이들 블루홀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100m 이상 낮았던 빙하시대에 육지의 석회암 지대가 침식으로 거대한 동굴과 같은 카르스트 지형이 형성되었다가,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동굴이 침수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아름답고 신비한 느낌마저 풍기는 이들 블루홀 중에는 벨리즈의 그레이트 블루홀처럼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도 있다. 그런데 외형뿐 아니라 또 다른 신기한 점은, 이들 상당수의 블루홀에는 민물과 바닷물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두 가지 물 중에서 밀도가 낮은 담수층이 밀도가 높은 염분층 위에 떠 있는 구조를 이룬다.

벨리즈의 그레이트 블루홀 ⓒ 위키미디어

바하마 북부에 있는 큰 섬인 그레이트 아바코섬(Great Abaco Island)에 형성된 블루홀인 소밀 싱크(Sawmill sink)는 육지에서 진입할 수 있는 입구가 있지만, 독특하면서도 위험한 곳이어서 전문 잠수부조차도 탐사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수중동굴이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서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독성이 강한 황화수소층이 있어서 그 부분을 신속하게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밀 싱크 수중동굴의 황화수소층 아래에는 담수와 해수가 공존하는 염분약층(塩分躍層; Halocline)이 형성되어 있다. 위층의 가벼운 담수와 아래층의 무거운 바닷물을 나누는 분리층은 매우 얇지만, 두 수중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물고기들은 이 경계를 건너지 못한다. 따라서 이곳은 생물 진화의 실험실과도 같은 곳인데, 이런 곳에서 희귀한 갑각류가 서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생물학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요지류(Remipedes)라 불리는 이 생물은 얼핏 지네를 닮아 보이지만 갑각류의 일종으로서, 1970년대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희귀한 동물이다. 요지류는 어두운 동굴 등에서 살다 보니 눈이 퇴화하여 시력을 상실했으며, 이후 대서양 양쪽 연안 등에서 여러 종이 확인되었다. 고생대 석탄기 후기의 화석종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공룡이 살기 이전부터 지구 상에 존재하던 동물 종인 것이다.

염분약층에서 서식하는 지네를 닮은 희귀한 갑각류 ⓒ Ivanenko VN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온 타임캡슐과 같은 물은 더 있는데, 흥미롭게도 대조적인 매우 ‘뜨거운’ 물과 매우 ‘차가운’ 물을 포함하고 있다. 바다 밑바닥에 지각이 갈라진 곳에서 뜨거운 물과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열수분출공(Hydrothermal vent)은 생명체 탄생의 발원지로 대단히 유력한 곳이다. 물과 에너지, 무기물 등 생명 탄생에 필요한 요소들이 한데 모여있기 때문이다. 심해의 열수분출공 부근은 지금도 희귀하고 독특한 생물들이 다량 서식하는 등 바다 밑 다른 곳에 비해 생물의 서식 빈도가 매우 높다.

그러나 열수분출공이 있는 지역이 외부와 따로 격리된 곳은 아니므로, 그곳의 바닷물이 타임캡슐처럼 오랜 세월 보존되어 왔다고 볼 수는 없다. 열수분출공과 비슷한 환경을 지니면서도 외부세계와 수백만 년 또는 수억 년 이상 동안 격리되어 온 오래된 물을 찾기 위해서, 남아프리카의 광산 아래를 탐사한 생물학자도 있다.

남아프리카의 모압 코총(Moab Khotsong) 광산은 오랫동안 금과 우라늄을 채굴해 온 규모가 상당히 큰 광산인데, 지면 아래의 거리가 3km에 이를 정도로 세계적으로 깊은 광산이기도 하다. 생물학자 에럴 케이슨(Errol Cason)은 이곳에서 금보다 더 귀한 물을 채취하기 위해 광산 맨 아래층의 단열대에 구멍을 뚫어 탐사를 해왔다. 결국 단열대의 균열이 생긴 암반에 고인 물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채굴하는 광물들이 약 30억 년 전에 생성된 것임을 감안할 때에 물 역시 매우 오랜 세월 동안 타임캡슐처럼 외부세계와 격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모압 코총 광산 아래 지하 깊은 곳은 뜨거운 열과 방사선에 엄청난 압력을 받으면서, 산소와 영양분도 희박한 가혹한 곳이다. 물론 지구 상의 극한 환경에서 사는 미생물들도 적지 않은데, 그중 일부는 세포 분열 한 번에 천 년이 걸릴 정도로 그런 환경에 적응해서 생존과 진화를 해 온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다.

뜨거운 온천과 같은 극한적 환경에서 사는 미생물도 있다 ⓒ 위키미디어

에럴 케이슨의 연구팀은 잘해야 단세포의 미생물 정도를 발견하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그보다 훨씬 큰 0.5mm 정도의 살아 숨 쉬는 벌레도 나와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체의 능력과 그 한계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깨뜨릴 정도라 하겠는데, 땅속 깊은 곳과 같은 극한적 환경에서도 생물은 생존해왔고, 비록 느리지만 진화 또한 거듭했던 것이다.

뜨거운 물의 타임캡슐과는 대조적인 ‘차가운 물의 타임캡슐’이라 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빙하코어(Glacier core)이다. 극지방 등의 빙하에서 채취한 원통 모양의 얼음 기둥을 의미하는데, 과거의 여러 지구 환경 요소들을 담고 있는 빙하코어의 과학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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