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인

이야기는 진화의 산물

이야기는 우리의 기억 구조와 닮아

최근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면서 정보 전달에 대한 고민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정보가 공해로 느껴질 만큼 폭발하고 있지만 정작 가치 있는 정보가 버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각 분야에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도 ‘어떻게 하면 유용한 정보를 더 잘 기억하고 저장하게 할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문자가 없던 시대 정보유통 방식은 이야기

스토리텔링의 전문가이자 경희대 국문과 최혜실 교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대해 “이제까지 인쇄매체 시대에 유통됐던 추상적이고 공식 대입을 통해 얻었던 정보로는 현재 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갈등과 문제를 풀어내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말했다.

▲ 이야기 구조 자체가 인간에게 각인된 기억구조이기 때문에 스토리텔링 정보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형태이다 ⓒScienceTimes



사실 문자가 없던 시대에 정보는 흘러 다녔다. 언어 자체가 단순 의사를 표현하는 기호에서 벗어나 경험과 감성이 묻어있는 이유에서다.

한번 생각해보자. ‘엄마’, ‘아빠’, ‘가족’이란 단어에서 어떤 느낌이 나는가? 따뜻함이다. 반면 ‘강도’, ‘도둑’이라는 언어에서는 어떤 감정이 드는가? 하지 말아야 할 윤리적 질서가 생각난다.

이처럼 단어 하나에도 인류의 경험적 이야기가 담겨있다. 물론 더 많은 정보를 담게 되면 긴 이야기가 된다. 신화, 전설, 민담이 그렇고 성경, 불경, 논어 등 성인들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정리하자면 과거 인류가 정보를 전달하던 매뉴얼이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정보가 인쇄매체 시대에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형식으로 바뀌었다. 

최 교수는 “정보의 형식 변화는 인간의 사고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는 이 시점에서 구술 시대 정보 전달 방법에 눈을 돌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한 실험사례가 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구술집단과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나누어 톱, 도끼, 칼, 나무 중 범주가 다른 것을 고르라는 질문을 했었다. 실험 결과 구술집단은 칼을, 전문가들은 나무를 선택했다.

구술 집단은 상황 중심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칼은 부엌의 물건이라고 여겼고, 전문가 집단은 보편적,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까닭에 나무 외 세 가지는 연장이라 분류한 것이다. 

인간은 대본 형식으로 기억을 저장

현대인들이 왜 인쇄매체 시대보다 더 단순했던 구술시대의 정보 방법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일까. 단순히 사고방법의 변화만을 위해서일까.

최 교수는 “이야기 구조 자체가 인간에게 각인된 기억구조이기 때문에 스토리텔링 정보는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말했다. “이야기는 인간이 수 만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 중 하나로 인류가 자연에 적응하고 진화해온 정보형식”이라는 것. 

당초 인지 과학자들 역시 뇌와 컴퓨터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정보처리체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언어를 번역해내는 동시통역기와 말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하면 로봇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모든 언어 정보와  온간 문법, 경우의 수를 로봇 속에 넣었는데도 진짜 인간처럼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인지 과학자들은 이후 인간의 마음구조가 사전식이 아니라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판단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언어 연구 역시 인간의 인지구조나 마음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고 있는 것도 그 안에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봇의 인간의 언어를 상황별로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성장이나 진화와 관련된 경험적 이야기가 없어서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로 만든 정보, 그리고 그 안의 언어가 바로 진화의 산물인 셈이다.

▲ 경희대 국문과 최혜실 교수 ⓒScienceTimes

예를 들어보자. 김철수라는 사람이 오래간만에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수많은 제자가 있기 때문에 김철수를 기억해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김철수는 선생님에게 그냥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옛날에 선생님 수업하실 때 어떤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이 너무 건방져서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시며 혼을 내셨다’고 김철수가 말하게 되면 선생님은 ‘아! 그 김철수’라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바로 김철수라는 이름이 선생님의 경험 속에 저장됐기 때문에 기억해낸 것이다. 그런데 로봇에게 김철수라는 단어를 말하면 어떤 대답을 할까.

최 교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 지명 같은 고유명사를 직접 기억하기보다 당시 그와 관련한 경험했던 이야기를 나열하는 과정에서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며 “이는 경험이 하나의 대본인 스크립터로 기억을 저장해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 중에 있는 주말 드라마 ‘넝쿨째 들어온 당신’에서 이런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방귀남(유준상)과 차윤희(김남주)의 조카 방장군(곽동연)이 그 주인공이다.

방장군은 대조영을 드라마 속 배역인 최수종으로, 세종대왕을 한석규로 아는 인물로 암기력이 아주 나쁘다. 그런데 드라마 대본은 귀신처럼 외우는 자질을 가지고 있다. 비록 좀 극단적으로 표현됐기는 했지만 근거 없는 설정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서사구조는 문제해결 방법과 닮아

그렇다면 왜 정보를 이야기로 기억하고 끄집어내는 것일까. 최 교수는 “우리의 경험적 이야기는 어느 상황을 가정한 대본과 같다”면서 “그래서 비슷한 상황이 오면 그 대본을 바탕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모든 분야에 스토리를 접목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는 것도 문제해결 능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프랑스 요리를 먹어본 적 없는 두 사람이 프랑스 식당에 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한 사람은 독일 요리는 먹어본 적이 있고, 다른 사람은 한식 외에는 먹어본 적이 없다.

한식만 먹었던 사람은 프랑스 요리를 주문하기 어렵겠지만 독일 요리를 먹어본 사람은 그것을 응용해 프랑스 요리를 주문할 수 있다. 즉 독일요리를 먹었던 상황을 하나의 대본으로 기억하고 있고, 그 대본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내고 있는 셈이다.

최 교수는 “인지 과학자들도 많은 경험의 대본을 갖고 있거나 하나의 대본을 여러 가지 상황으로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 문제해결 능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며 “사회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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