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 62번길에는 약 1000 제곱미터의 대지에 지상 2층 규모의 ‘우장춘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1999년 10월 21일 개관한 기념관의 1층에는 우장춘 박사가 생전에 사용하던 현미경과 친필 논문 원고, 연구노트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2층에는 무, 토마토, 감자 등 우 박사가 개발한 43종 171점의 원예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야외 마당에 가면 우 박사가 직접 만든 것으로 알려진 ‘자유천’이란 우물을 볼 수 있다. 자유천(慈乳泉)이란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으로서, 여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데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일본에 있던 어머니가 임종했을 때 우 박사는 장례식에 참석조차 못한 채 바다 건너 멀리서 눈물만 훔쳐야 했다.
대신에 우 박사는 각지에서 들어온 부의금으로 자신이 근무하던 연구소와 물이 부족한 지역에 우물을 파는 선행을 베풀었던 것. 세계적인 육종학자이자 우리나라 육종학의 개척자인 우 박사는 왜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것일까.
우장춘 박사는 1898년 4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아버지 우범선과 어머니 사카이 나카[酒井仲]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여섯 살 되던 해인 1903년 11월 24일 오후 7시경 아버지 우범선은 칼과 쇠망치 등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범인은 평소 아버지와 알고 지내던 고영근이라는 조선인이었다.
고영근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우범선이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간 조선훈련대 제2대 대장이었기 때문이다. 을미사변 후 목숨의 위험을 느낀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해 현지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 우장춘 박사를 낳았던 것이다. 고영근은 명성황후의 집안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이 없었으나 정부에서 시국사범으로 몰았다고 한다. 고영근 또한 당시 시국사범으로서 자신의 죄를 덜고 국내에서 그에 대한 보답을 받기 위해 우범선을 살해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 취득
어쨌든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우장춘은 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바람에 고아원에 맡겨지는 등 어린 시절을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보냈다. 고학으로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도쿄제국대학 공학부에 진학하려는 원래의 꿈을 접고 조선총독부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도쿄제국대학 부설 농학부 실과대학(일종의 전문대학)에 입학했다. 이 과정은 정식 대학과는 달리 농촌지도자 양성 코스로서 수준이 좀 낮은 편이었다.
대학 졸업 후 일본 농림성 산하의 농사시험장에 들어간 그는 공부를 계속해 1936년 5월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때문에 우장춘에게는 한국 최초의 농학박사라는 호칭이 따라다녔으나, 사실은 그보다 먼저 농학박사가 된 이가 있었다. 우장춘보다 몇 개월 앞서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곰팡이를 이용한 식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임호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우 박사는 박사 학위 취득 이후 농사시험장에서 기수(技手)라는 직급으로 승진했으나 창씨개명을 거부하면서 사표를 제출한 뒤 교토에 있는 다키이 종묘회사로 직장을 옮겨 초대 연구농장장으로 근무했다. 광복 직후 그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직접 농장을 경영하던 우 박사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결국 1950년 3월 귀국하게 된다.
당시 한국은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져 농사를 지을 종자조차 변변히 없는 실정이었다. 더구나 일본에서 들여오던 각종 종자의 반입이 중단되어 커다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초대 대통령을 맡았던 이승만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당시 일본에서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은 우장춘 박사를 데려오게 된 것이다.
밤낮없이 육종 연구에만 매달려
부산의 동래원예고등학교에서 귀국한 우 박사를 위한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열렸는데, 경남지사가 환영사를 하고 이승만 대통령도 귀국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전보를 보내올 만큼 우 박사에 대해 거는 기대가 컸다.
그때 우 박사는 일본인 어머니와 부인은 물론 그 사이에 낳은 2남 4녀의 자녀를 모두 일본에 남겨둔 채 귀국한 상태였다. 우 박사가 일본인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고도 가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숨어 있었다. 그처럼 우 박사를 어렵게 모셔온 한국 정부가 모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해 여권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 박사는 귀국한 후 밤낮없이 육종 연구에만 매달렸다. 귀국한 그해 5월 부산 동래의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으로 취임했으며, 1953년에는 국립중앙원예기술원 원장을 맡았다. 그동안 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감귤을 재배하는 기술을 체계화시켜 겨울 추위를 견디는 제주도 감귤의 재배법을 확립했으며, 진도에서 무와 배추의 대량 생산에 성공해 국내 자급을 가능하게 했다.
1958년에는 원예시험장 초대장장을 맡아 강원도 대관령에서 병이 없는 씨감자를 개발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오늘날의 강원도 감자를 있게 했다. 이 씨감자는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밖에도 우 박사는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했다. 해방 후 한국 경제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이룬 최초의 분야가 채소였다고 할 정도이며,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식탁에 풍성한 채소들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장춘 박사 하면 무엇보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의 최초 개발자는 우장춘이 아니라 그와 친분이 있던 일본 교토대학 기하라 히토시 박사이다. 기하라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것은 1943년이며, 우 박사는 귀국한 후인 1953년 씨 없는 수박의 시범 재배에 들어가 1955년 한국농업과학협회 주도로 씨 없는 수박 시식회를 열어 우리나라의 일반 대중에게 선보였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 시연했기 때문에 누구도 최초 개발자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 의해 자연스레 우 박사가 최초 개발자로 각인됐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씨 없는 수박의 발명자로 알려졌으며 심지어 교과서에도 그렇게 실렸으나 1980년대 말에 모두 정정됐다.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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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4-06-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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