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남극에 관심을 보인 것은 지금부터 25년도 더 된 1978~79년이었다. 당시 수산청은 어획경비의 반을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남빙양에서 어획하던 수산회사에게 크릴을 잡도록 했던 것이 남극에 대한 연구의 효시이다. 크릴(krill)은 흔히 남극새우로 알려져 있지만, 아가미가 밖에서 보이고 일생 물에 떠서 살고 모양과 생태가 새우와는 다른, 일종의 동물성 플랑크톤이다.
길이가 5-6cm인 크릴은 남빙양에 워낙 많아, 고래와 물개와 펭귄의 먹이가 되면서 남빙양의 생태계를 유지한다. 크릴은 남빙양에 수억 톤이 사는 것으로 알려지자, 시험삼아 잡아 이용가능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수산청이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 전에는 舊소련, 일본, 舊서독, 프랑스, 폴란드, 미국, 칠레, 대만이, 모두 해마다 수십만 톤의 크릴을 어획하거나 생태를 조사했으며 남빙양의 일반해양을 조사했다.
당시 남북수산과 대호원양과 동방원양 같은 수산회사가 어획한 수천 톤의 크릴의 일부는 사료와 연구에 쓰였으며, 보존이 잘 된 것은 낚시 미끼로 일본에 수출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어획경비를 지원하는 형식이 융자형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크릴의 용도가 크게 많아지지 않았고 크릴 자체의 문제점도 있어, 적어도 우리나라의 크릴어획은 활기를 띄지 못했다.
윤석순(尹碩淳)씨가 총재로 있던 한국해양소년단연맹과 주식회사 문화방송은 청소년들에게 호연지기를 길러주 려는 목적으로 1985년 11~12월에 걸쳐 한국남극관측탐험을 주관했다. 이 탐험대는 높이 4,897m의 남극최고봉인 빈슨산괴(Vinson Massif)를 등정하는 팀과 킹조지섬을 탐험하는 두 팀으로 구성되었다.
윤석순씨는 탐험대를 조직하면서, 외무부의 요구로 과학자를 탐험대에 참가시켰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원 부설이었던 해양연구소의 허형택(許亨澤) 소장은 당시 연구원이었던, 현재 강릉대학교 교수인 기상학자 최효(崔孝)박사와 지질학자인 나를 지명했다.
이 인연으로 이후 우리나라의 남극연구는 (한국)해양연구소가 주관하게끔 되었다. 정부기관이 아닌 사설기관이 조직한 한국남극관측탐험은, 우리나라가 남극최고봉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등정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극의 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대단히 크다.
우리나라는 1986년 11월 세계에서 33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했다. 당시 UN 회원국이 아니었던 우리나라는 미국의 중재로 남극조약에 어렵게 가입했다. 남극조약에 따르면 UN 회원국은 자동으로 가입할 수 있다. 그러나 비회원국은 기존 남극조약협의당사국(南極條約協議當事國 ATCP)의 만장일치의 승인을 받아야했다.
당시 협의당사국에는 중공, 동독, 폴란드 같은 이른바 적성국가들이 있었다. 만약 이들 가운데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우리는 남극조약에 가입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미국이 중재해 우리나라가 가입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남극조약에 가입한 것은, 당시 외무부가 국제사회를 멀리 내다 본, 훌륭한 조치라고 굳게 믿는다.
외무부가 1987년 초 연두업무보고를 하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될 수 있는 한 빨리, 남극기지를 짓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주 칠레 한국대사관의 주진엽(朱進燁) 참사관, 해양연구소 연구원, 현대엔지니어링 기술자들은 1987년 4~5월에 걸쳐 킹 조지 섬에서 남극기지 후보지를 답사하게 되었다.
그 때가 이미 남극의 겨울이 시작될 때라 다른 곳을 조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후보지 답사반은 칠레기지의 마을에 머물며, 칠레기지의 헬리콥터와 러시아 기지의 설상차를 타고, 기지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그러한 곳의 전체지형, 지면의 기울기와 상태, 취수가능성, 해안의 상태를 조사했고 기록했다.
답사반이 돌아온 다음, 현대그룹의 건설기술자들은 답사결과를 바탕으로 기지를 급하게 설계했으며 건설자재와 건설장비를 준비했다. 한편 서울에서는 남극과학연구위원회(SCAR)에 해당되는 국내조직인 한국남극연구위원회(KONCAR)가 창립되었다.
남극에서는 여름에만 일을 할 수 있어 일할 시간이 짧은지라, 건물을 짓기보다는 조립하는 것이 주요한 업무로, 건설기술자들은 연습으로 건물을 조립해보았다고 한다. 마침내 1987년 10월 15일 기지건설선 이었던 'HHI 1200호’는 울산항을 떠나, 남극으로 향했다. 건설선은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기술자들을 태웠고, 12월 15일은 현장에 도착했으며 다음날에는 기공식을 했다. 기지건설작업은 남반구의 여름을 이용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침내 1988년 2월 17일 세종기지를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8번째로 상주남극기지를 건설한 나라가 되었다. 해양연구소는 대한민국 남극과학연구단 하계연구대와 월동연구대를 조직했으며, 강원도 용평에서 스키와 동계등반 같은 월동훈련을 했다.
하계연구대는 800톤급 칠레 배를 빌려 기지주변의 일반해양조사를 비롯해 대기상태를 조사했으며 지질학자들은 육상지질을 조사했다. 13명으로 구성된 1차 월동대는 1989년 2월 8일까지 기지에 머물면서 대기, 일반지질, 일반해양을 비롯하여 기지주변의 자연환경을 관찰하고 그 변화를 기록했다. 한편 1988년 11월에는 제1회 국제남극과학 심포지엄을 서울에서 열어, 우리의 연구결과를 외국사람들에게 발표하고 교환할 기회를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세종기지를 짓고 주변지역을 연구한 결과는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아, 1898년 10월 18일에는 23번째로 남극조약협의당사국의 자격을 획득했다. 이 결과 우리는 명실공히 남극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발언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남극은 태평양 심해저 망간단괴와는 달리, 인류공동의 유산이 아니다.
기존의 협의당사국들이 연구결과를 심의해, ‘남극 실질연구’를 하는 나라만을 만장일치로 남극조약협의 당사국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 자격을 가진 나라들만이 남극의 장래를 논의할 수 있고 남극에 관련된 규정을 만들거나 없앨 수 있다. 현재 45개 나라가 남극조약에 가입했으나 협의당사국은 27개 나라 뿐이다. 한편 신문사에서도 남극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바로 한국일보사의 도움을 받은 등산가 허영호씨가 1993~94년 남극점까지 걸어갔으며 2003~04년에는 박영석씨가 동아일보사의 후원으로 남극점까지 걸어갔다. 한국해양연구원은 북극연구에도 관심을 가져 1999년부터 중국과 러시아와 공동연구를 했다. 북극에관한 관심은 계속되어 2002년 4월 25일에는 국제북극과학위원회(IASC)에도 가입했으며 4월 29일에는 북극 스발바드 군도에 다산기지를 개설했다.
북극은 남극과 달리 주인이 있어, 다산기지는 노르웨이 영토에 지은 건물로,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면서 운영된다. 또 세종기지처럼 연중 사람이 지키는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경우에만 지킨다. 남극과 북극에 기지를 운영하면서, 위에서 말한, 한국남극연구위원회는 2002년 6월 한국극지연구위원회(KONPOR)로 그 이름을 바꾸어, 남극연구와 북극연구를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국제남극과학 심포지움은 계속되어, 2003년 11월에는 제 10회 심포지움이 인천에서 개최되었다. 한편 현재 남극 세종기지에서는 윤호일 박사를 대장으로 한 17차 월동대 15명이 기지둘레의 환경변화를 관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극지연구에 더욱 관심을 가져, 2004년에는 6천 톤 급 쇄빙선을 설계하기 시작했으며 4월 16일에는 극지연구소가 한국해양연구원에 부설로 만들어져, 독자 예산을 세우고 인사권을 갖게 되었다.
예정대로 2008년 쇄빙선이 건조되면, 우리나라의 극지연구는 한 단계 더 높아지리라 기대된다. 그때에는 98%가 평균 두께 2,160m의 얼음으로 덮인, 한반도의 60배가 넘은 거대한 남극대륙을 연구해, 그야말로, ‘남극다운 연구’를 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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