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들이 몰려 있는 유럽이 홍역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하면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4만1000여 명의 유럽인이 홍역에 걸렸으며, 그중 37명이 사망했다. 2016년 루마니아로부터 시작된 홍역은 그해 5,273명, 지난해 2만3927명이 걸리는 등 유럽에서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가장 심한 루마니아의 경우 최근 2년간 약 1만5000명 이상이 홍역에 감염돼 그중 59명이 사망했다. 금년에는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2만여 명의 홍역 감염자가 발생했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러시아에서도 모두 1000건 이상의 발병 사례가 보고됐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이들 국가에 대해 홍역 관련 여행 경보를 발령했다. 우리나라 질병관리본부도 국민들을 대상으로 유럽 등지의 해당 국가로 여행 계획이 있는 경우 적극적인 홍역 예방접종을 지속적으로 당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럽에서 홍역이 이처럼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근래 들어 일기 시작한 반 백신 풍조 때문이다. 백신을 반대하는 자들은 홍역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질병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예방 접종을 의무가 아닌 자기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백신 불신 분위기는 홍역 백신 접종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루마니아의 경우 2017년 홍역 백신 1차 접종률은 86%, 2차 접종률은 75%다. 올해 가장 많은 홍역 환자가 발생한 우크라이나는 2007년 97%였던 백신 접종률이 2016년에는 42%로 급락했다. 심지어 이탈리아는 취학 전 아동에 대한 백신 의무 접종을 폐지하는 법률 개정안을 최근 의회에서 통과시키기까지 했다.
사회 전체 면역체계에 심각한 위해
영국 연구진의 2016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반 백신 풍조가 가장 강한 10개국 중 7곳이 유럽인 것으로 나타났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게 되면 홍역에 걸릴 위험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유럽 질병예방통제센터는 예방 접종 상태가 알려진 유럽의 홍역 환자 중 87%가 예방 접종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유럽에서 일어난 백신 거부 풍조의 확산에는 나름대로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 영국의 대장외과 전문의인 앤드루 웨이크필드 박사가 1998년 의학지 ‘랜싯’에 발표한 논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홍역, 볼거리, 풍진을 예방하는 혼합 백신인 MMR이 아동의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국 의학위원회는 2008년 웨이크필드 박사의 의사 면허를 박탈했으며, ‘랜싯’ 지는 2010년 그의 논문을 철회했다. 웨이크필드 박사가 연구 과정에서 부적절한 방법을 택했으며, 백신 반대 소송 변호사들에게 거액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문의 내용은 백신 반대론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여전히 괴담처럼 전해져오고 있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백신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 일부 이슬람교도들의 경우 백신에 이슬람 율법상 허용되지 않은 물질이 들어 있다며 자녀들에게 백신을 접종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지난해 인도네시아에서는 디프테리아가 확산되면서 4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호흡기 점막이 약한 어린이들에게 주로 발생하는 급성 전염병인 디프테리아는 백신 보급으로 거의 퇴치된 질병이다.
백신 반대 분위기 확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면역체계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백신을 맞아야 하는 질병은 대부분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아동 사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인 홍역도 사실은 전염되기 가장 쉬운 질병 중 하나다. 또한 홍역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예방 접종을 받지 않고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60대 이상이라도 누구든지 발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홍역 백신이 다른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도 감소시켜
전문가들은 홍역 발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인구의 95% 이상 면역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봄 우리나라에서도 국외 유입으로 인해 홍역의 집단 유행이 2건 발생했지만 각 3명의 환자가 발생한 후 추가 환자가 없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홍역 백신 접종률이 매우 높아 홍역이 들어와도 집단 면역이 잘 되어 있어 추가 전파가 잘 되기 않기 때문이다. 주요 질병에 대한 국내 어린이의 백신 접종률은 97%로서 다른 선진국보다 높은 편이다. 우리나라는 2014년에 WHO로부터 홍역 퇴치 국가로 인증 받았다.
한편, 홍역 백신은 홍역뿐만 아니라 다른 전염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도 낮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1960년대부터 홍역 백신의 접종이 시작된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다른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도 급격히 낮아지는 현상이 관찰됐다. 영국과 유럽 일부 국가는 물론 최근에 백신 접종을 도입한 개발도상국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보고됐다.
프린스턴대학 연구진은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지를 파헤친 연구 결과를 2015년 ‘사이언스’ 지에 게재했다. 그에 의하면, 홍역에 걸린 이들은 2~3년 후 다른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할 확률이 더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진은 그 이유에 대해 홍역 바이러스가 다른 질병의 면역 능력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했다.
즉, 4살 때 수두에 걸려 수두 면역력을 지닌 어린이가 5살 때 홍역을 앓게 되면 수두의 면역력이 제거돼 다시 수두에 걸릴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홍역 바이러스로 인한 면역 기억 상실증 이론은 아직 가설에 불과하지만, 홍역을 앓게 되면 적어도 2~3년간은 면역 체계가 약해진다는 점은 프린스턴대학 연구진의 논문에 의해 밝혀졌다고 볼 수 있다.
홍역 백신으로 홍역을 퇴치하게 되면 홍역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질병으로부터도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 이성규 객원기자
- yess01@hanmail.net
- 저작권자 2018-10-1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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