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전통음악 공연이 아니었다. 맑고 깔끔한 고유의 음률 뿐만 아니라 거칠고 변화무쌍한 전자음까지 섞여들었다. 손으로 현을 문지를 때도 스피커에서는 오묘한 소리가 쏟아져 나왔고 심지어 연주자가 몸을 기울여도 미세하게 소리가 달라졌다.
지난 14일(목)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진행된 ‘뉴미디어 아트 전문가 포럼’ 현장이다. 아제이 카퍼(Ajay Kapur) 미국 캘리포니아예술대 교수가 인도의 전통악기 ‘시타르’를 연주하고 강은일 서울예대 한국음악과 교수가 한국의 전통악기 해금을 맡았다.
악기 안에는 각종 센서가 내장되어 음파와 진동 뿐만 아니라 기울기까지 감지한다. 이를 디지털 신호로 전환시켜 전자음 효과를 덧붙이는 식으로 전통악기를 재탄생시켰다. 전자해금 이외에도 전자거문고와 전자장구가 등장해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허물었다.
‘전통음악과 현대기술의 융합방법론’이라는 주제 아래 국내외 미디어아트 전문가들의 공연과 토론으로 꾸며진 이번 행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 후원, 서울예술대학교 주최로 진행되었다.
로봇과 사람이 함께 연주하는 전통음악
융복합, 탈경계, 학제 연구 등 기존의 영역을 허물고 분야 간의 교류를 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유행하고 있다. 특히 실험성과 상호작용성을 겸비한 뉴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예술과 테크놀로지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추세다.
포럼의 첫 문을 연 카퍼 교수는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직접 악기를 만들고 또 연주하는 컴퓨터 공학자 겸 아티스트다. 인도계 미국인으로 어렸을 때부터 인도 전통음악을 접했던 그는 “언젠가 로봇을 만들어 함께 연주하고 싶다”는 꿈을 마침내 실현했다.
‘디지털 현악기 제작자의 여정(The journey of digital luthier)’이라는 사례발표를 통해 전자악기와 연주로봇의 개발과정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센서와 콘트롤러가 내장된 전자악기를 개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타블라(tabla), 돌락(dholak), 시타르(sitar) 등 인도의 전통악기들이 그의 손에서 전자장비로 재탄생했다.
기존에는 대규모 공연을 위해 악기의 원래 소리를 크게 증폭시키는 기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디스토션(distortion)’이라는 전자식 파열음을 정식 음악으로 이용하면서 전자기타는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카퍼 교수도 전통악기의 전자음을 그대로 노출시켜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전자악기의 신호를 이용해 무대 뒤편의 영상을 제어하는 인터페이스 기능까지 삽입했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각종 동작인식 센서를 ‘입는 컴퓨터’로 전환시켜 무용수에게 부착하면 소리, 움직임, 영상이 하나로 합쳐지며 무대와 객석의 교감도 그만큼 높아진다.
최근에는 서로 멀리 떨어진 연주자들이 영상, 음향,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동시에 퍼포먼스를 펼치는 텔레프레젠스(tele-presence) 기능도 도입했다. 미국에서 악기를 연주하면 한국에서 그에 맞춰 무용 공연을 진행하는 식이다.
이번 겨울에는 서울예대 초청으로 한국에 머물며 전자해금을 개발했다. 음파, 진동, 움직임까지 감지하기 때문에 연주자가 악기를 매만지고 두드리고 기울일 때마다 미묘하고 다양한 소리가 만들어진다.
카퍼 교수는 악기를 개량하고 제작할 뿐만 아니라 직접 연주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발표 후 실제 공연에서도 한국과 인도의 전통 현악기인 전자해금과 ‘e시타르’를 협연하며 수준급의 연주 실력을 뽐냈다.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공학자가 전통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전통음악을 디지털 기술 적용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해금을 함께 연주한 강은일 교수는 “전통이니까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사람들이 많이 찾고 또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라고 밝혔다.
전통과 현대, 예술과 과학이 어우러진 자리
이어진 세션에서도 전자식 전통악기가 계속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최초로 전자거문고와 전자장구를 제작하고 이후 전 세계를 순회하며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이뤄낸 김진희 작곡가가 뉴욕 라마마 극장에 등장했다. 서울의 관객들이 질문을 던지면 뉴욕의 연주자가 대답하고 연주하는 텔레프레젠스 방식의 강연이다.
우리나라의 창작 타악그룹 ‘공명’은 전자식으로 개량한 장구뿐만 아니라 피리, 대금, 태평소를 연주하며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냈다. 세계 무대에서도 호평을 받아 초·중등 교과서에까지 실린 실력파 연주자들이다.
2011년 대한민국 과학축전 개막공연의 총감독을 맡았던 전병삼 코이안 대표는 ‘로봇공학과 뉴미디어 기술을 활용한 뮤직로봇 개발과 로봇콘텐츠 사례’에 대해 발표했다. 전 대표는 거대한 마림바 연주로봇 ‘마리’를 개발하고 텔레커뮤니케이션과 로봇공학을 결합한 ‘텔레마틱 드럼 서클(Telematic Drum Circle)’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음악과 과학기술의 융합에 앞장서고 있다.
발표와 공연 이후에는 예술과 과학의 희망적인 만남을 지속하기 위한 전문가 토론이 이어졌다. 포럼을 기획한 송희영 서울예대 교수는 “일상생활 곳곳에서 디지털 기술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라며 “전통음악이 디지털 기술을 만나면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고 세계와 교감을 주고받는 일이 가능하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 임동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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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13-02-1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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