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다만‘물질’은 그 어딘지 모를 경계를 넘어 생명과 비생명 사이에 연속적으로 존재한다. 분자생물학이 생명현상을 관찰하다가 물질의 세계에 이르렀다면 생화학은 화학의 범주가 생명현상에도적용된다는 것을 발견한 순간 태어났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도 내려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있다. 그런 까닭에 각각의 학문은 여전히 고전적인 시각을 하나의 습관으로 가지고 있다. 동물의 생리현상이 해부학을 통해 장기라는 각 부분, 역할단위가
수행하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분자생물학에도 여전히 같은 시각이 존재한다. 다만 장기나 조직이 단백질들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즉, 생명반응에 참가하는 단백질-물질들을 여전히 생명의 일부로, 생명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생물학은 생명의 테두리를 넘지 않았다. 반면, 생화학은 화학이라는 낮은 수준의 관점(저열하다는 뜻이 아님)에서 출발하여 생명현상에 접근하고 있다.
비생명의 영역인 화학의 방법론과 관점으로 생명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생화학이야 말로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넘은 최초의 학문이며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에 서 있는 학문이다.
생화학의 태동은 유기화학의 시작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옛날사람들은 생명을 특별한 것으로 보았으며 생명체의 구성물질은 자연에서 만들어지는 것과는 다른, 오직 생명활동을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유기물(organic matter)이라는 말의 탄생에 반영되었다.
유기물들은 오직 생명체의 활동에 의해, 생명의 근원인 생기(vital force)의 작용을 통해서만 만들어 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828년, 독일의 F.뵐러가 시안산암모늄으로부터 유기물인 요소를 합성해 내자,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기 시작했다.
생명체 내에서 유기물을 만들어 내는 작용은 생기가 작용하는 신비로운 작용이 아니라 생명 외의 현상처럼 자연적인 현상이며 실험실과 시험관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은 성질의 것, 더 나아가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이제야 사람들은 비로소, 생명을 특별한 것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 화학이나 물리 등의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의 과학자인 파옌(Anselme Payen)이 최초의 효소인 디아스타아제(diastase, 녹말분해 효소)를 발견한데 이어 뷰흐너(Eduard Buchner, 1860-1917)는 효모없이 효모의 추출물만으로도 알콜 발효가 가능함을 보였다.
이로 인해 생명현상도 시험관에서의 물질 합성과 똑같은 화학작용의 결과이며 각각의 작용은 그 작용을 매개하는 효소에 의해서 이뤄진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러한 인식은 생체 내에서의 물질대사 과정과 그 과정을 담당하는 효소를 찾아내는 과정으로 연구의 중심을 옮겼다. 이 과정을 통해 고전 생화학은 지난 1세기 동안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바로 생명체 내에서 물질대사 경로의 대부분을 밝혀낸 것이다.
생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물질을 받아들여 유기물질로 만들고 성장의 자양분으로 사용해야 하며 우리는 밥을 먹고 소화를 시켜야만 힘을 내고 활동할수 있다.
생화학자들은 어떻게 식물이 물과 햇빛, 이산화탄소를 가지고 포도당을 만들어 내는지, 그 물질 합성의 경로와 에너지 저장원리를 알아냈으며 포도당이우리 몸속에서 어떤 경로로 분해가 되어 그 안에 가두고 있던 태양에너지를 우리의 근육과 뇌 안으로 방출하 는지를 알아냈다.
독일의 생화학자 한스 아돌프 크랩스(Hans Adolf Krebs, 1900-1981, 1953년 노벨 생리학상 수상)는 1937년 모든 생물이 공유하는 에너지 대사 과정인 시트르산 회로(TCA or Krebs cycle)를 밝혀내어 생물이 에너지를 얻는 방법에 대해서 밝혀내었고, 미국의 생화학자 캘빈(Melvin Calvin, 1911-1997)은 광합성 과정 중 암반응의 대사과정을 찾아냈다.
이와 같은 물질대사 과정의 연구에서 각각의 반응을 담당하는 효소들이 분리되었으며 이 효소들의 특징은 기존의 화학이 정립해 놓은 이론들에 의해 설명되었다. 여기에서 생화학의 중요한 분야, 혹은 생화학 그 자체로 지칭되는 효소학이 탄생했다. 효소학은 생명현상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분자와 분자간의 상호작용을 다루어 생명현상을 원자나 분자수준에서 기술했던 것이다.
효소학은 1980년대 후반까지 생화학의 대명사로서 생명안의 다양한 화학반응을 설명하는 많은 이론을 내놓았다. 특히 콘버그(Arthur Kornberg 1918-, 1959년 노벨 생리학상 수상)에 의한 DNA 중합효소의 발견은 유전이라는 생명현상의 본체에 대한 화학적 설명을 가능케 하여 생명과 물질 사이에 다리를 놓은, 생화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힌다.
물질대사연구와 함께 생화학 연구에 있어 주축이 된것은 생명현상의 중심축인 유전과 그에 관련된 현상을 화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유전과 생명현상의 주인공인 DNA는 프래드릭 미셔(Friederich Miescher 1844-1895)에 의해 세포의 핵에서 1869년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DNA가 유전물질임은 무려 80년이 지난 후인 1944년, 에버리(Oswald Theodore Avery 1877-1955)에 의해 밝혀졌다.
에버리는 독성이 없는결핵균에 독성이 있는 결핵균의 DNA를 주입했을 경우
독성이 생기는 것을 보여 생물의 형질은 DNA가 결정 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 발견은 슈뢰딩거에게 영감을 주어 결국 그는「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DNA란 유전정보가 암호화되어 있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1953년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의 이중나선구조가제창되었다.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의 비율이 같다는‘샤가프의 법칙(Chargaff’s rule)’과 이중나선 구조는 상보적 결합을 통한 정보보존과 복제라는 놀라운 자연의 수완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 정보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여전히 미궁이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965년, 미국의 생화학자인 니렌버그(Marshall Warren Nirenberg, 1968년 노벨생리학상 수상)와 그의 동료들의 드디어「생명의 책」의 첫 번째 장을 기록했다.
3개의 염기서열이 하나의 아미노산에 대응되는 유전암호를 모두 해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생화학자들은 개개의 생명현상들을 시험관에서(in vitro) 연구하고 재현해 내는데 성공했으며 생화학의 업적들은 분자 생물학을 주축으로 하는 현대 생명과학의 탄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생명현상에 대해 총체적인 접근을 하는 -omics(유전체학genomics, 단백질체학proteomics)의 시대에 개별분자의 특성을 연구하는 생화학이란 조금 고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생화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90년대에 불어닥친 인간게놈프로젝트같은 고속화, 대형화, 전체화하는 연구경향에 대해 불안감과 소외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 -omics들이 아무리 많은 발견을 한다 하더라도 생물학적인 현상을 재구성하여 예측 가능한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결국 미시적인 수준에서의 개별 분자들 간의 상호작용의 파악, 즉 생화학 이나 효소학적인 방법이 필요해진다. 마치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처럼. 생명현상은 부분의 합보다 전체가 항상 더 큰 미스테리한 존재이다.
분자생물학이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을 연구하고 있다면 현대 생화학은 부분들이 모여 어떻게 전체를 이루는 가를 알아내야 한다. 1+1=2가아닌, 3이 되는 그‘경계’를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복잡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생명이란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 혹은 혼돈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창세기나 기타 창세 신화를 보면 혼돈으로 가득한 우주에 신이 질서를 부여하여 세계를 만들었다하니 어떻게 보면 과학과 신학은 통할지도 모르겠다.) 현대 생화학은 그 말을 염두에 두고 물질과 생명 사이에서, 비생명과 생명경계에서 고군분투해야 할 것이다.
- 정진원 연세대학교 생화학과 박사수료
- 저작권자 2004-09-1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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