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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근 객원편집위원
2005-03-14

미국사회보장제도를 창안한 위대한 혁신가 뉴딜정책의 챔피언 프랜시스 퍼킨스 미국 노동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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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정책의 챔피언”

그녀는 위대한 노동자의 옹호자였다. 루즈벨트 대통령 집권 당시 12년간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고 미국 최초의 여성장관이었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였고 사회보장제도를 창안해 내는데 일등 공신역할을 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를 뉴딜 정책의 챔피언이라고도 부른다.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는 50년 동안이나 노동자들에게 불리했던 노동법을 개정해 노동자들의 최저임금과 초과근로시간을 규정하는 새로운 공정노동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특히 주당 40시간 이상의 근무에 대해서는 추가 노동시간으로 임금을 더 지불하도록 의무화한 장본인이다.


1882년 보스톤에서 태어난 퍼킨스는 농부이면서 기능공의 오랜 후손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안락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퍼킨스가 두 살 때 가족 모두가 메사추세츠주 로 이사했다. 여기서 부친은 문구점을 운영해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그의 부모는 교회에 열성적이었다.


슬럼가를 통해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해

퍼킨스는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Mount Holyoke College)에 다니면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경제사를 공부했다. 당시 제이콥 리스(Jacob Riis)가 뉴욕 슬럼가를 폭로한 책 ‘다른 반 수의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How the Other Half Lives)’를 읽으면서 그녀는 빈민 노동자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또한 노동운동가를 비롯해 국민소비자연맹 의장이던 플로렌스 켈리(Florence Kelly)와 같은 사회개혁가들이 주최하는 강연회에 자주 참석하곤 했다.


퍼킨스는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Mount Holyoke College) 역사교수인 안나 메이 슐(Annah May Soule)의 영향을 받아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대우 받는 작업현장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메이 슐 교수는 학생들을 직물이나 제지 공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가난한 근로자들이 착취 당하며 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태마니홀을 방문하는데도 주저하지 않아

노동자에 대한 그녀의 진짜 관심은 콜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으면서 시작됐다. 콜럼비아 대학이 운영하는 자선학교에 제출할 ‘거주자들의 생활상태’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뉴욕시 인근의 빈민가 헬스 키친(Hell’s Kitchen)을 조사하게 됐다. 이 때 퍼킨스는 맨하탄 중서쪽 지역에 있는 악명 높은 태마니 홀 (Tammany Hall)의 우두머리인 티모시 맥마누스(Timothy McManus)를 만나러 간다. 태마니홀은 태머니派의 회관을 말하며 태머니파란 당시 뉴욕시정 (市政)을 지배하던 보스기구의 속칭이다. 대부분 혁명전쟁 퇴역군인들이 조직한 공화파 기구를 말한다. 국내에서는 갱 오브 뉴욕(Gang of New York)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맥마누스(McManus)는 그 지역 빈민가정을 도와주겠다는 그녀의 호소를 잘 받아들였다. 퍼킨스는 여기서 그가 설득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또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910년에 퍼킨스는 뉴욕소비자연맹 의장이 되었다. 거기서 그녀는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Triangle Shirtwaist)社 화재로 146명의 공장 노동자가 사망한 이후(이들 대부분이 어린 여성이었다) ‘직업 안전법(job safety)’을 위한 투쟁을 이끌었다. 이 때를 계기로 퍼킨스는 더욱더 적극적인 사회운동가가 됐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에서 그녀는 권력구조의 외곽에 머물렀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녀의 능력에 한계가 나타났다. 퍼킨스가 남성중심의 힘이 지배하는 정치계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명확히 그녀를 옹호해 주는 후원자가 필요했다.


두 명의 후원자, 스미스 주지사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명은 뉴욕주 지사인 알 스미스(Al Smith)였다. 그는 퍼킨스가 작업장의 보건과 안전에 대하여 개혁운동을 벌이는 것에 감명을 받아 그녀를 자신의 비호 아래 두었다. 스미스 주지사는 그녀를 1919년에 주 산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926년에는 주 노동부 산업국 여성의장으로 앉혔다. 퍼킨스는 노동법이 별로 힘이 없고 활동적이지 않던 노동관련 기관들을 독려하고 목소리를 내도록 만들었다. 스미스 주지사가 주당 노동시간을 54시간으로 줄이도록 입법화 하는 것을 도운 것이 그 예이다.


또 다른 후원자는 루즈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는 퍼킨스를 산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지명했다. 이로서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뉴욕주 최고의 노동부 관리가 된 것이다. 1933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퍼킨스를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할 때 스미스 전 주지사조차도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조언을 구한다. 그러나 여성의 명령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라며 의구심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불운한 사람들을 위해 그토록 오래 투쟁했던 퍼킨스가 대공황의 밑바닥에서 현저한 두각을 나타낸 것을 보면 시의적절한 임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공황 당시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잃고 무일푼이 되어 빈곤층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계 미국인 격리수용소 건설을 반대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퍼킨스는 종종 대통령 보좌관들의 자문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 장관으로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2차 대전동안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미국에서 모든 사람들이 신분증을 지참하도록 하는 명령을 거두어줄 것 설득한 사람이 그녀였다.


퍼킨스는 열정적이며 비범한 정치적 용기와 신속한 회복능력을 발휘한 정치인이다.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하늘을 찌를 때 일본계 미국인을 격리하는 수용소를 건설하자는 정부의 방침을 반대했다.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스스로 고백한 웨스트 코스트(West Coast) 노동자들의 지도자인 해리 브리지스(Harry Bridges)를 국외로 추방하는 것도 반대했다. 이로 인해 의회는 1938년 그녀를 탄핵하려 했으나 그 시도를 이겨냈다.


사회주의자로 탄핵을 받을 뻔한 경우도 있어

퍼킨스는 1945년 4월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집권하자 그녀는 시민 서비스 위원회(Civil Service Commission)의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여기에 7년 동안 머무르면서 1965년 사망할 때까지 코넬 대학(Cornell University)의 ‘산업노동 대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민주당은 퍼킨스가 많은 화이트 칼라 전문 직업인들의 초과 근무할 기회를 뺏어간 법률을 만든 장본인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라는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이 인권국가로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는 이면에는 이 여성노동운동가의 종교와 같은 위대한 믿음과 실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위대한 혁신가다.

김형근 객원편집위원
저작권자 2005-03-1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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