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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06

맨하탄 계획, 그 신화와 실상 이관수 서울대학교 자연종합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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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을 만들어낸 "맨하탄 계획" 만큼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과학기술 프로젝트도 드물 것이다. 핵무기의 위력이 거대한 만큼, 맨하탄 계획에 대한 신화도 많고, 또한 맨하탄 계획의 의의가 그런 신화에 의해 가려지기도 한다.

아인슈타인보다는 모드위원회가

흔히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가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시작한 계기였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본인도 그렇게 생각해 후회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계기로 설치한 소위 '우라늄 위원회'는 딱 두 번 모임을 가졌을 뿐이고, 질라르트와 페르미에게 실험재료 구입비 6천불을 지원한 것 외에는 대학 실험실 차원에서 진행되던 연구에 대한 정보를 수집, 교환한 것이 전부였다. 1940년 6월 우라늄 위원회의 업무를 흡수한 전미국방개발위원회(NDRC)도 원자력 개발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서 몇몇 대학의 기존 설비를 이용하여 mg단위의 소량 샘플에 대한 연구만 진행했을 뿐이었다. 좀 넓게 보면 핵분열 소식이 알려진 1939년 초부터 독일, 프랑스, 영국, 소련,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여러 물리학자들이 언젠가는 핵분열을 군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규모 연구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라늄 위원회'가 없었더라도 미국의 NDRC가 소규모 원자력 연구를 했을 개연성은 아주 높다.

원자폭탄 개발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영국으로 망명한 독일 출신의 프리시와 파이얼스였다. 그들은 원자폭탄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우라늄 235(U-235)의 양이 600g정도일 것이라고 추산하고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제작할 위험성에 대해 영국 과학계에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때마침 독일 점령 하의 덴마크에서 닐스 보어가 영국에 보낸 전보에 MAUD양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MAUD양을 만난 적이 없는 영국 물리학자들은 보어가 암호문으로 독일이 원폭을 개발하고 있다고 알렸다고 착각하였다. 그래서 보어의 '암호문'에서 이름을 딴 모드(MAUD)위원회가 출범하였다. 1941년 7월에 비밀리에 발간된 모드위원회 보고서는 10kg정도의 우라늄 235만 있으면 원폭을 제조하는데 충분하며, 원폭의 크기는 항공기 투하가 가능할 정도가 될 것이고, 제작하는데 약 2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는 원폭이 당장 진행 중인 독일과의 전쟁에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 있으며, 독일이 원폭을 먼저 제작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뜻이었다.

독일 공군의 폭격 범위에 들어 있는 영국에서는 원폭제조에 필요한 설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영국은 미국에게 모드위원회 보고서를 넘겼고, 1941년 8월에는 모드위원회 위원이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원폭개발연구 착수를 촉구하였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이때부터였다(스파이망을 활용하여 모드위원회 보고서를 입수한 소련도 같은 시기에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하였다).


공업력의 승리

미국 원자폭탄 개발체제를 이끈 사람은 전기공학자 베네버 부시(V. Bush)였다. NDRC의 초대 의장이었던 부시는 1941년 여름 신설된 대통령 직속 과학연구개발국(OSRD)의 장으로서 미국의 전쟁연구개발 체제를 총괄하였다. 부시의 주도 아래 1941년 11월에 원자폭탄 개발 방향의 대강이 수립되었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은 지 열흘 후에 당시 부통령 월러스가 주제한 회의에서 부시의 조치들이 승인되었다.

1942년, 미국 핵계획의 초점은 핵분열 물질 확보방법을 마련하는 것에 있었다. 우라늄 농축 공장들(어느 농축법이 성공할지 몰랐기 때문에 갖가지 방법을 채용한 농축 공장들을 동시에 건설하였다) 및 플루토늄 재처리 설비를 건설하는 일은 1942년 여름 미 육군 공병대가 맡았다. 1942년 핵개발 예산 8천4백만 달러 중 5천 4백만 달러가 공병대에 할당되었다. 그런데 공병대의 작업은 팬타곤 건설책임자였던 그로브즈 대령이 핵개발계획을 위해 신설된 맨하탄 관구의 책임을 1942년 9월에 맡을 때까지 지지부진하였다. 부임 6일만에 준장으로 승진한 그로브즈는 국방구의 담당위원회를 협박해서 전략물자배정 최우선순위를 확보하고, 듀퐁사를 끌어들여 핵분열 물질 생산설비 건설을 맡도록 하였다.

원자폭탄 설계 및 제작을 맡은 뉴멕시코주 로스알라모스가 원자폭탄의 탄생지로 유명하지만, 정작 맨하탄 계획의 중심지는 테네시주 오크리지였다. 1943년 2월부터 테네시주 오크리지에는 우라늄 농축 및 관련연구 단지가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그 해 여름에는 맨하탄 관구 사령부가 오크리지로 이전하였다. 오크리지 단지 건설 및 관리의 총책임은 듀퐁사가 맡았고, 코닥사와 유니언 카바이드사가 운영하청업체로 참여하였다. 듀퐁사는 워싱턴주 핸포드에 세워진 플루토늄 생산용 원자로 및 플루토늄 분리 단지도 건설하고 운영하였다. 농가 몇 가구를 퇴거시킨 후 건설되기 시작한 오크리지 단지는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미국에서 6번째로 큰 버스망을 갖춘 복잡한 도시로 팽창하엿다.

오크리지는 전쟁 말기 미국 전력생산량의 1/7, 뉴욕시 전력소모량의 120% 가량을 소비하였다. 맨하탄 계획 예산 약 20억달러 중 10억 달러 가량은 우라늄 분리 설비에 들어가는 강력한 전자석용 전선을 만들기 위해 포트녹스(미국 재무부의 불준비금용 금은을 보관소)에서 가져온 은괴 1만5천톤을 환산한 비용일 정도로 오크리지의 전력소모량은 막대하였다(전후에 은전선들을 다시 은괴로 만들어 재무부에 반환하였다). 이런 전력은 뉴딜시절 진행된 유명한 테네시강 유역 개발사업 덕분에 공급이 가능하였다. 이때 건설된 수력발전소들이 오크리지에 전력을 공급하였던 것이다(이런 인연으로 TVA 총재였던 릴리엔탈이 2차대전 후 초대 원자역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다).

결국 미국이 2차대전 중에 원자폭탄을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산업생산력과 부 덕분이었다. 듀퐁, 코닥 등 미국의 거대 화학기업들이 쌓아온 거대설비 건설 및 운영 경험과 테네시강 개발 사업으로 건설된 수력발전소들 그리고 지불준비금용으로 쌓아둔 귀금속 등이 원자폭탄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2004-02-0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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