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력(火力)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은 보통 불로 한다. 즉, 실제 전투에서는 총탄이나 파편에 대한 방호도 중요하지만, 화염과 열기에 대한 방호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무기들이 화재를 일으켜 적을 살상하는 것을 주효과 또는 부수효과로 삼고 있다.
특히 항공기 승무원, 전차병, 군함 승조원 등 밀폐된 장비 내에서 근무하는 인원들은 화재 발생 시 빨리 도망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장비에서 화재가 발생해도 화염과 열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면서 탈출할 시간이나마 벌어줄 수 있는 난연 및/또는 방염 피복의 중요성은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약 10여 년 전, 모 민간 군사 매니아 단체에서 국군 구형 얼룩무늬 위장복 원단, 국군 특전사용 신형 전투복 원단, 미군 전투복 원단에 대한 연소실험을 실시한 바 있다. 실험 조건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이 실험에서 국군 전투복 원단은 둘 다 미군 전투복 원단보다 떨어지는 난연성을 보였다. 심지어 국군 특전사용 신형 원단은 국군 구형 얼룩무늬 위장복 원단보다도 난연성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지난 2019년 국내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모 대학 연구소에서 조건을 잘 통제했다는 실험 장면에서도, 현용 디지털 전투복 원단이 구형 얼룩무늬 위장복 원단보다 떨어지는 난연 성능을 보인 적이 있다. 간단히 말해, 화재 시 더 빨리, 더 많이 탔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현용 디지털 전투복 원단은 연소 시 용융 및 적하 방지 성능도 구형보다 떨어졌다. 즉, 열을 받은 원단이 녹아서 전투원의 몸에 들러붙고, 이로써 전투원의 화상 피해를 가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구형 얼룩무늬 위장복 원단은 폴리에스터 65%, 면 35%의 혼방 재질이다. 폴리에스터 재질은 연소 시 용융 적하 현상을 일으키지만, 면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면은 일단 젖으면 쉽게 마르지 않아 땀이 많이 나는 여름철 착용감이 매우 나빴다. 그 때문에 현용 전투복은 속건성을 확보하기 위해 재질을 폴리에스터 73%, 레이온 27%로 변경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폴리에스터와 레이온 모두 난연 성능이 떨어지고 용융 적하를 잘 일으키는 화학 섬유다.
그 때문에 용융 적하 현상이 적거나 없는, 이른바 <노 멜트 노 드립> 원단의 전투복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코듀라 나일론과 면을 52대 48로 혼방한 나이코(NyCo) 원단이 대표적인 <노 멜트 노 드립> 원단이다. 면의 비율을 높여 목표한 효과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착각의 늪과 공학적 난제
첨단과학 시대인 21세기이지만, 대중들의 과학 이해도는 기술의 발전 정도에 비하면 놀랄 만큼 낮다. 심지어는 이걸 입고 다니는 군인들조차도 <노 멜트 노 드립> 원단의 한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한계는 분명하다. <노 멜트 노 드립> 원단도 난연성이 높고 용융 적하로 인한 2차 피해를 덜 일으킬 뿐, 불이 전혀 붙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피복의 일부에 불이 붙었을 때 화염으로부터 빨리 떨어져서 몸을 땅에 굴린다든지 하면 쉽게 불이 꺼진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노 멜트 노 드립> 원단은 어디까지나 불에 쉽게 타지 않는 난연이지, 화염과 열기를 막아주는 방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항공기나 차량 승무원 등 화재 시 몸 전체가 화염과 열기에 휩싸일 수 있고, 빨리 도망갈 수 없는 인원들에게는 이것 역시 비난연 원단에 비해 전혀 나을 것이 없다. 게다가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크게 문제가 된 IED(급조 폭발물)은 보병들까지도 그런 상황에 내몰았다. 소방관들이나 F-1 레이서들의 장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러한 상황에서는 난연이 아닌 방염 원단(노멕스, 파이로쉘 등)으로 이루어진 복장으로 풀세트(심지어는 속옷과 장갑, 신발까지)를 갖추어야 생존 확률을 유의미한 수준으로 높일 수 있다. 그런데도 <노 멜트 노 드립> 난연 소재 전투복 한 벌이 그런 방염 소재 피복의 저렴한 대체재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노 멜트 노 드립> 원단의 비결이 용융 적하 현상이 적은 면의 비중을 늘린 것인데도 불구하고, 코듀라 나일론을 그 비결로 착각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 전투 경험이 많은 선진국 군대에서는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항공기 조종사나 전차병의 전투복으로 난연이 아닌 방염 소재 피복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모든 장병에게 지급하지 않는가? 방염 소재 피복에도 여러 중대한 공학적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비방염 원단에 비해 비싸다. 게다가 노멕스 등 전통적인 방염 소재들은 착용감이 매우 안 좋다. 또한 인체와 환경에 유해한 재료로 제작되므로 건강 및 환경 파괴 문제가 늘 따라다닌다. 안전하면서도 착용감이 뛰어나고, 경제적이기까지 한 군용 피복을 만드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 이동훈 과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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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 2021-03-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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