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박사로 잘 알려진 석주명(石宙明, 1908~1950)은 평생을 나비에 미쳐서 보냈다. 그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때 가장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일본 저명 학자들의 잘못된 연구를 바로잡음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과학자이기도 했다.
또한 한국산 나비에 대해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자로서 나비 연구의 현대화와 생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탄생 100주년이던 지난 2008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25번째로 헌정되었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평양 이문리에서 아버지 석승서와 어머니 김의식의 3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여 집안이 부유했는데, 어머니는 어린 석주명에게 비싼 타이프라이터를 선물로 사줄 정도로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1921년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동맹휴학 사태가 일어나 이듬해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그때만 해도 공부보다는 음악과 연극을 더 좋아한 석주명은 거기서 과학자의 길로 이끌어준 스승을 만나게 된다.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박물학 교사로 재직 중이던 유명한 조류학자 원홍구가 바로 그였다.
석주명은 원홍구의 지도와 영향을 받아 1926년 졸업한 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립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일본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 교수의 사사를 받았던 그는 생물과 관련된 공부를 하며 나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유학에서 돌아와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박물교사가 된 석주명은 1931년 모교인 송도고보로 직장을 옮겼다. 그는 거기서 1942년까지 약 11년간 교사로 지내면서 한국산 나비에 대한 분류학 연구에 매달렸다.
쉬는 날마다 포충망을 들고 개성 주변의 산과 들을 누볐으며, 방학이 되면 개성을 벗어나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니며 나비를 채집했다. 허름한 복장에 쓸모도 없는 나비를 찾아 헤매는 그를 두고 뱀을 잡는 땅꾼으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조선의 나비박사로 서양학자들에게 알려져
석주명은 학생들에게도 나비를 채집해오라는 방학숙제를 내줬다. 당시 송도고보에는 전국 각처에서 모인 학생들이 많아 방학이 끝나면 전국 각 지방의 나비들이 석주명의 연구실에 쌓이곤 했다. 그가 나비박사로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 동안의 연구활동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그의 활동이 외국에까지 알려지게 되는 사건이 우연히 벌어졌다. 1931년 어느 날 미국 앤드류스 공룡탐사대의 일원인 모리스 박사가 몽골지방의 탐사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다가 개성에서 열차를 내렸다. 원래 경성에 내린다는 것이 실수로 개성에서 내렸던 것.
개성에서 별로 할 일이 없었던 그는 다음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송도고보에 들려 박물관을 구경하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바로 거기에 전시되어 있던 석주명의 나비 표본과 원홍구의 조류 표본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모리스 박사는 석주명에게 미국의 박물관들에 나비 표본과 연구자료를 보낸다는 조건으로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다음해부터 미국의 박물관과 나비 표본의 교환을 시작한 석주명은 미국 하버드대학교 비교동물학과장의 도움을 받아 다른 서양학자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양에 그의 업적이 알려지자 1939년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부’에서 석주명에게 한국산 나비에 대한 연구를 총정리한 논문 집필 요청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1940년에 발간된 것이 바로 ‘조선산 나비 총목록(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이란 영문 단행본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 학자가 과학 분야에서 영문으로 된 연구서를 펴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석주명이 외국 저명학자들의 잘못된 연구를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이론’ 덕분이었다. 그가 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만 해도 이미 한국 나비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었다.
개체변이 연구로 외국 학자들의 오류 바로잡아
석주명은 자신이 채집한 나비표본들을 일본 곤충학의 대가들이 발간한 마츠무라의 ‘일본곤충대도감’과 우치다의 ‘일본곤충도감’ 등과 비교해 정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가 기존의 도감에 실린 내용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즉, 자신의 연구결과에 같은 종으로 분류된 표본들이 도감에는 다른 종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 학자들이 범한 오류를 자신이 창안한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이론’을 토대로 바로잡아 나갔다. 당시 나비 연구자들은 자신이 채집한 개체가 조금만 특이하면 신종이나 아종으로 등록하곤 했다. 그러나 석주명은 그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해 그처럼 특이한 개체들이 환경의 차이에 따른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개체변이란 같은 종인데도 날개 길이 및 빛깔, 무늬수 등의 형질이 다른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석주명이 우리나라 각지에서 계절마다 수집한 배추흰나비만 해도 17만여 개체나 되었다. 그것을 모두 분석해 그동안 신종이나 아종으로 보고되었던 20여 개의 학명이 모두 하나의 배추흰나비임을 알아냈다.
그 같은 연구를 통해 석주명은 외국 학자들이 다른 종으로 분류한 921개의 한국산 나비 가운데 무려 844개의 동종이명을 말소시켰다. 이는 전체 동종이명의 90퍼센트가 넘는 수치였다. 석주명의 연구결과 한국 나비는 250여 종으로 정리되었는데, 오늘날 한국산 나비와 밝혀진 종수와 비슷한 수치임을 감안할 때 놀라운 연구 업적이다.
하지만 석주명의 그 같은 연구결과에 대해 반박하는 일본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일본곤충대도감을 발간한 마츠무라 역시 자신의 연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했음에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아 기존 연구가 잘못됐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초급대학 졸업의 식민지 교사가 일본 제국대학 교수들의 연구를 바로잡았다는 자신감은 그의 말에서도 당당히 드러나고 있다.
석주명은 1939년 ‘조광(朝光)’ 6월호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34년의 논문에서 179개의 동종이명을 학계에서 말소시켰는데, 아직까지 아무 항의도 없다는 것에서 과거의 학자가 얼마나 개체변이를 확대시하고 많은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 (하편에서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 저작권자 2014-05-2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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