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초의 과학자

[한국의 과학기술인] 이태규 (상)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5)

“모든 사람들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에게 부여된 생을 영위한다. ‘어떻게’ 보내는 것이 참 가치 있는 일일까 연구하며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리하여 내가 얻어낸 결론은, 내게 주어진 삶을 성심 성의껏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학자다. 그래서 나는 예리한 관찰과 꾸준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게 되었으며 이 구절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 길로 걸어왔다. 그리고 결코 후회하거나 바꿀 의도는 없으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로 걸어가겠다.”

위 글은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한 국립현충원의 국가유공자 제2묘역의 12번 묘비에 적혀 있는 구절이다. 이 묘비의 주인공은 우리나라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태규 박사다.

이태규 박사는 일본과 미국을 넘나들며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했던 화학자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이기도 하다. 1931년 7월 20일자의 조선일보를 보면 그에 대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이태규 씨에게 이학박사의 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이태규 씨는 충청남도 예산 출생으로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고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마친 후 교토제국대학 이과 화학교실에서 3년간 수학하고 연구를 거듭하던 중 금번에 이학박사의 논문을 제출한 것이다. 이 씨는 금년 34세로 조선이 나은 최초의 이학박사로 각 방면에 기대가 자못 크다.”(현대 한글 표기법으로 변경)

젊은 시절 실험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태규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젊은 시절 실험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태규 박사 ⓒ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당시는 일제의 식민 통치 하에 있던 때로서 삼일운동 이후 독립투사들이 잡혀가거나 해외로 망명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이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우리 동포들이 심한 굴욕적 대우를 받고 있던 터라 이태규의 박사 학위 취득은 한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엄청난 소식이었다.

때문에 이 소식은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등의 타 신문에도 실렸다. 또한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언론들도 이 사실을 보도할 만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신문에 보도된 것처럼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는 아니다.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는 1926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천문학으로 학위를 받은 이원철 박사다. 또한 1928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물리학 박사를 취득한 조응천 박사도 있었다. 당시 신문들이 정보에 어두워 이처럼 보도했을 뿐이다.

한국인 최초의 화학박사

1902년 1월 26일 충남 예산에서 한학자 이용균의 6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이태규 박사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러다 예산보통학교에 진학해 수석으로 졸업한 후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거기서도 서울의 부잣집 아이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한 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의 물리 및 화학을 전공하는 반에 들어간 그는 첫날 물리학 교사가 들어와 칠판에 영어를 적었는데, 그 말의 의미는커녕 무슨 알파벳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는 식민지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에게는 영어를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밤을 수없이 세우며 노력한 덕분에 교토제국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할 수 있었다. 거기서 일본 최고의 화학자인 호리바 교수를 만나 ‘환원 니켈 존재하의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주제로 한국 최초의 화학박사를 탄생시킨 논문을 완성시켰다. 1937년 일본인 교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리바 교수의 추천으로 교토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9년에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유는 그 대학에 촉매학의 권위자였던 H. S. 테일러 박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 밑에서 촉매학을 좀 더 연구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테일러 박사와는 약 반년 동안 공동연구를 하다가 헨리 아이링 교수 연구실로 옮겼다. 이에 대해 이태규 박사는 1977년 월간 세대 1월호에 기고한 원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내가 프린스턴으로 가서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액체이론 심포지엄이 열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액체이론 학자들이 참집하였다. 지금 생각나는 대로 들면 영국의 레너드존스, 네덜란드의 닐스 보어, 미국의 아인슈타인, 아이링, 메이어 등이다. 나는 이분들의 심원한 이론 전개와 진지한 질의토의에 매료되고 말았다. 나도 이론화학자가 되어 이분들과 어깨를 겨룰 만한 학자가 되어야겠다는 야심이 이때 생겼다. (중략) 실험을 하여도 이론적 뒷받침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반응동력학의 이론을 공부하려고 아이링 교수 연구실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대 문리과대학 초대학장 역임

그런데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험악해진 미국-일본 간의 관계로 1941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이 박사는 교토제국대학 정교수가 되어 양자화학이란 신학문을 일본에 도입했다. 1945년 마침내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그는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장을 맡았다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의 발표 후 좌익계를 중심으로 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맹렬한 반대 운동을 펼치자,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이 박사는 1948년 미국 유타대학의 연구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함께 연구했던 아이링 교수가 유타대학교 대학원장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 박사는 25년 동안 근무하며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논문은 ‘비뉴턴 운동이론’이다. 아이링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하여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이라고도 불리는 이 이론은 그동안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루는 일반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1973년 한국과학원(KAIST의 전신)이 창설되면서 이 박사는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영구 귀국해 후학을 가르치며 대학이 연구하는 곳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불어넣었다. 이처럼 그의 끊임없는 연구와 교육 덕분에 우리나라의 화학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일찍 정착하여 성장할 수 있었다.

유타대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제자로는 한상준 전 한양대 명예총장, 전무식 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장세헌 서울대 명예교수, 최상업 전 서강대 부총장, 김각중 전 경방회장,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명예회장 등이 있다. 71세 때 한국과학원 명예교수로 옮긴 이후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며 12명의 박사와 24명의 석사를 길러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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