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에 이름을 남긴 역사상의 위인들 중에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크게 힘입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동양에서 대표적인 예를 꼽으라면, 삼천지교(三遷之敎)라는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맹자(孟子)의 어머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불을 끄고 어두운 가운데 가지런히 떡을 썰어서 아들의 부족함을 깨우쳤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긴 한석봉의 어머니 등 여러 사례가 있다.
그렇다면 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과학자의 어머니’들은 누구를 들 수 있을까? 과학자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다른 어느 과학자들보다도 과학기술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의 어머니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디슨이 초등학교시절에 엉뚱한 질문을 일삼는 등,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중퇴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발명왕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들의 창의적 소질과 비범한 면을 제대로 파악하고 올바른 교육에 힘썼던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훗날 에디슨 스스로도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어머니 덕분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아들의 교육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후에 위대한 과학자로 성공시킨 여성으로서, 화학자 멘델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 없다.
멘델레프의 원소주기율표는 오늘날에도 모든 화학교과서의 표지 안쪽에 나와 있을 정도로 화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여러 어려운 여건을 딛고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던 뒤안길에는 온갖 희생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아들을 뒷바라지한 어머니가 있었다.
드미트리 멘델레프는 1834년 2월 7일, 러시아 서부시베리아 지방의 토볼스크라는 마을에서 1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자매들은 일각에서는 11남매라고도 하고 혹은 16-17남매에 이르렀다는 설도 있으니, 아무튼 대단한 대가족이었던 셈이다.
멘델레프의 아버지는 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식이 많은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많은 자녀들을 훌륭히 길러냈는데, 특히 막내였던 드미트리 멘델레프는 ‘미차’라는 애칭으로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드미트리가 10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가 병을 앓아서 실명했기 때문에 학교도 그만두어야만 했다. 퇴직한 아버지가 받는 연금만으로는 많은 식구가 살아가기에 너무도 모자랐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모진 세파와 싸우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토볼스크 지방에 일찍 정착했던 그녀의 친정은 유리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친정아버지로부터 유리공장을 인수받아 경영에 나섰다.
멘델레프의 어머니는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하여 공장을 번창시켰고, 가족들은 여장부 어머니덕에 그런대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멘델레프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유리공장에 드나들면서 유리가 만들어지는 과정 등에 관심을 보였고,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나중에 대학에 보내려고 일찍부터 돈을 저축하였다.
드미트리는 학교에서 수학이나 과학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학자의 필수언어인 라틴어를 비롯한 외국어에는 통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드미트리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2 년 전인 14세 때부터 그의 가정에는 불행이 겹치게 되었다. 조용히 여생을 보내던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유리공장이 큰 화재로 전소되었다. 드미트리의 어머니는 공장을 재건할 만한 큰돈이 없었고, 막내의 진학을 위해 저금해둔 것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그녀의 소원은 단 하나, 막내인 드미트리를 명문 모스크바대학에 진학시키는 일이었다. 그녀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식구를 이끌고 시베리아의 추위를 무릅쓰고 머나먼 길을 걸어서 모스크바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드미트리 멘델레프는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라틴어를 비롯한 몇 과목의 성적이 좋지 않은데다, 그는 시베리아 지방의 사투리만 알 뿐 모스크바 지역의 표준어를 몰랐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드미트리는 이때 어머니의 낙담한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하면서, 차선책으로 아버지의 모교였던 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시체만 보면 기절할 정도로 심신이 약했기 때문에 의사가 되기도 부적격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드미트리가 페테르부르크 교육대학에 막내아들을 입학시켰는데, 마침 학장이 아버지의 옛 친구였기 때문에 드미트리는 가까스로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드미트리가 천신만고 끝에 대학생이 된 기쁨도 잠시, 입학 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아들을 위해서 너무 혹사한 결과, 폐결핵에서 회복되지 못했던 것이다. 1850년 디미트리의 어머니는 16세인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서 과학연구에 매진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났다.
디미트리는 그 이후 항상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한 채 공부에 몰두하였고, 몸이 허약해서 그 역시 폐결핵으로 고생하기도 하였으나 1855년에 1등으로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기념으로 받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어머니의 묘소로 향했다고 한다.
그 후 디미트리 멘델레프는 186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기화학 교과서’, ‘화학의 기초’ 등의 저술활동도 왕성히 하였다.
또한 잘 알려진 대로 원소들의 주기적 성질을 연구한 결과, 1869년부터 원소주기율표를 처음으로 만들어서 화학을 비롯한 근대과학의 발전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 최성우 과학평론가
- 저작권자 2018-05-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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