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달개비 콘퍼런스 하우스에서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여성과총) 젠더혁신연구센터가 주최한 젠더혁신 정책연구회 특별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네케 클링게 박사(Ineke Klinge, 70)가 출석해 '유럽연합 과학 연구 및 기술혁신에서의 젠더 평등 정책: 젠더혁신 1 및 2'라는 주제로 특별 강연을 진행했다.
네덜란드 태생의 클링게 박사는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 마스트리흐트 대학,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 베를린 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유럽연합 젠더 혁신 2 프로젝트 집행 위원회 조사관을 맡고 있다.
특별 강연에서 클링게 박사는 그동안의 과학 연구가 지나치게 남성 위주로 진행되어 왔음을 지적했다.
클링게 박사는 "세상은 남성과 여성, 아이와 노인, 흑인과 백인, 황인 등 다양한 인구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과학 연구, 특히 유럽에서의 과학 연구는 연구자와 피험자 모두가 너무나도 백인 남성 위주였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러한 문화가 다른 인구 집단의 특성을 무시한 연구 결과를 낳았고, 여성이나 유색인종에게 유해한 상품의 개발과 생산까지도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유럽연합은 이미 1950년대부터 섹스와 젠더적 차이를 연구에 반영하기 위해 정책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클링게 박사는 설명했다.
즉 의사 결정에서 양성간의 균형을 맞추고, 연구에 젠더적 차원을 반영하고, 모든 수준의 연구에서 양성별 균형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
특히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총 7년간 약 800억 유로의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유럽 연합 최대의 연구 및 기술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2020'은 젠더 자문단을 두고, 섹스 및 젠더적 차원이 잘 반영된 연구에 연구 자금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젠더 혁신(Gendered Innovation), 즉 양성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양성의 삶의 질을 모두 개선할 수 있는 혁신기술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이다.
젠더 자문단은 2014년~2018년간의 활동을 통해, 필요한 연구자 교육 내용과 연구 내용 평가 기준을 마련했고, 연구계에도 섹스 및 젠더적 차원의 적용 필요성을 인식, 이러한 차원이 적용된 연구의 비중을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노력은 2018~2020년간 진행될 젠더 혁신 2에서도 계승 발전될 전망이다.
이하는 클링게 박사와의 일문일답이다.
Q: 어떤 계기를 통해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A: 나는 생물학 중에서도 특히 면역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내가 박사 과정을 거치던 1970년대의 유럽 면역학계에서는 여성, 특히 임산부의 생리적 특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암 연구분야에서도 심각했다. 심지어는 여성 연구자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인식이 없었다. 그러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출산 이후 젠더 연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Q: 과학 연구에 대한 젠더적 차원 반영 문제에서 한국의 상황은 어떻다고 보는가?
A: 한국은 이 문제에서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발전 속도를 보여 주어 놀랍다.
유럽과의 차이점이라면 유럽에서는 사회과학 분야에서 시작된 젠더 연구가 이후 자연과학 분야에 넘어왔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과학기술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다만 연구가들 간 네트워크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점, 젠더 문제와 관련된 여러 학문 분야 간의 융합이 취약한 점은 문제점으로 보인다.
유럽의 경우 로시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 같은 페미니즘 철학자들도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젠더 문제에 대해 잘 알고 발언할 만큼 학문 분야간 융합 및 연구자들 간의 네트워킹이 이루어져 있다.
젠더 혁신 2에서는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히 공학, 환경, 에너지 분야에서의 젠더적 기술 혁신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해 주었으면 한다.
Q: 과학기술계는 여성의 참여 자체가 부족한 분야로 유명하다. 여성 연구자들의 참여를 유치하기 위해 유럽에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A: 유럽에서는 특히 과학기술계에 꿈을 가진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기술계의 유망성과 즐거움에 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홍보한다.
특히 과학기술계에 투신한 여성들은 그동안 남성들이 간과했던 문제들을 여성 특유의 시각을 통해 발견할 수 있고, 그를 통해 학계는 물론 스스로의 발전을 이룰 수 있음을 알린다.
예를 들어 가정용 로봇, 스마트 주택 같은 기술과 시스템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도 많이 사용하게 되는 것들이다. 따라서 연구 개발에 여성적인 시각이 개입되어야 여성 고객들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다. 그러한 역할은 오직 여성 연구자들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여성 연구자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Q: 한국 내에서는 젠더 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네덜란드 및 유럽에서도 그러한가?
A: 젠더 혁신과 젠더 차원을 연구에 반영하는 것은 젠더 갈등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러나 보건 분야의 젠더 연구는 여성들의 경험에서 시작되었고, 페미니즘 운동이 그동안의 지식 공백에 대한 연구를 확장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Q: 그 외에 독자들께 꼭 전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A: 젠더 문제는 넓은 시각으로 봐야 한다. 생물학적·사회적·문화적 차이가 무시되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이미 증거들도 충분하다. 또한 같은 성별 내에서조차도 여러 요인에 의해 건강 및 질병 상태의 차이가 있다.
그런 차이를 낳는 다양한 요소들을 이제는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정밀의학’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양성의 차이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모든 남성이 동일하지 않고 모든 여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젠더 혁신 연구는 한국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젠더 혁신은 많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으며 모두의 행복과 건강을 증진할 것이다. 젠더 혁신의 목표는 그저 과학 분야의 여성 종사자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 자체를 더욱 정확하고 정밀하게 바꿔나가는 것이다.
이번 방문을 통해 한국에서 젠더혁신연구센터가 하는 활동들에 정말 큰 감명을 받았다. 한국에서 젠더 혁신의 역사가 길지 않음에도 짧은 시간 안에 정말 많은 것들이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서울에서 UN SDGs와 관련하여 젠더 서밋 글로벌이 최초로 개최되는 데 매우 기대가 크다.
- 이동훈 과학 칼럼니스트
- enitel@hanmail.net
- 저작권자 2019-10-0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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